이 세상 사람들은 대체로 ‘네 종류의 나’로 살아간다.
첫째, ‘타고난 나’이다. 엄마 아빠의 유전자를 그대로 물려받아 모습, 기질, 재주까지 모두 부모와 닮은꼴로 형성된 ‘나’이다. 이는 선천적 자아로서 그 힘은 매우 견고하다. 그래서 많은 이들이 이런 ‘나’의 모습을 쉽게 벗지 못한다. 그래서 ‘사람은 어떤 부모에게서 태어나느냐’가 중요하다.
물론 그렇다고 지금 내 모습에 꼭 그런 ‘나’만 있는 건 아니다. 소위 ‘학습된 나’도 있다. 이는 어릴 적 나의 ‘의미있는 타자’(significant others)로부터 보고 들으며 후천적으로 형성된 ‘나’이다. 어떤 말을 많이 들었느냐, 어떤 장면을 많이 보았느냐, 어떤 것을 많이 경험했느냐, 어떤 습관을 가졌었느냐에 따라 형성된 인격과 능력이다. 그런 점에서 ‘사람은 어떤 가정환경에서 자랐느냐’도 중요하다. 하지만 내 안엔 또 다른 ‘나’도 있다. 그것은 ‘의식하는 나’이다. 이는 무언가를 이성적으로 판단하기 시작할 때부터 배워서 형성된 ‘나’이다. 이에는 학교에서 배운 여러 지식들을 비롯, 사회생활을 통해 얻은 도덕, 윤리, 법질서에 관한 의식도 포함된다. 또 독서나 영상매체 그리고 개인의 경험을 통해 느끼고 깨달은 것도 포함된다. 그래서 어느 정도는 무엇이 옳고 그른지, 무엇이 더 중요한지를 아는 ‘나’이다. 그런 점에서 ‘사람은 무엇을 배웠느냐’도 ‘나’를 형성하는 중요한 요소가 된다. 그렇다면 이들 셋 중, 무엇이 가장 강력할까? 어떤 ‘나’가 지금의 ‘나’를 지배할까? 언뜻 생각하면 현재 이성에 의해 ‘의식하는 나’라고 여길지 모른다. 하지만 아니다. 놀랍게도 내 경험에 의하면 오히려 ‘의식하는 나’가 제일 약하다. 그것이 ‘타고난 나’와 ‘학습된 나’를 이기지 못한다. 물론 보통 때야 ‘의식하는 나’로 산다. 잠잠하면 표가 안 난다. 하지만 갈등상황을 만나면 ‘타고난 나’, ‘학습된 나’는 여지없이 튀어나온다. 그것이 말과 사고와 행동을 결정하는 더 강력한 기준이 된다. 결국 배운 것보다 익숙한 것을 따른다. 그러니 이를 어쩌면 좋을까? 부모 잘못 만난 자식과 좋은 집안 배경에서 좋은 것 보지 못하고 자란 이들은 영 가망이 없는가? 정말 ‘의식하는 나’에게 힘을 불어넣을 우군은 없는가?
결론부터 말하자면 있다. 얼마든지 ‘타고난 나’, ‘학습된 나’를 능가할 수 있는 길이 있다. 이는 내가 ‘거듭난 나’가 되면 된다. 하나님 앞에서 진정으로 회개하고, 예수그리스도의 죄사함의 은총을 경험하고, 성령을 인생의 새로운 주인으로 영접하면 된다. 그러면 그 사람은 초강력 울트라 파워를 가진 ‘거듭난 나’가 된다. ‘타고난 나’, ‘학습된 나’도 그 앞에선 맥을 못 춘다. 왜냐하면 날 낳은 부모나 내가 자란 환경보다 하나님의 능력이 더 크시기 때문이다. 그래서 성경에서도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다”(고후 5:17)고 했다. 내 인생의 주인을 내 부모나 경험이나 지식이 아닌 성령으로 바꿀 수만 있다면 얼마든지 가능하다. 그렇게만 되면 사람은 새 능력을 가진 새사람이 된다. 좋지 못하게 ‘타고난 나’와 부정적으로 ‘학습된 나’도 거뜬히 이긴다. 그러니 노력하는 것 가지고는 한계가 있음을 빨리 알아차려야 한다. 사람은 거듭나야 하나님 나라를 본다.(요 3:3) 그래야 세상 나라에서 익숙해진 정서, 습관, 태도, 관점도 이긴다. 그러니 하물며 우리의 목회랴! 목회는 ‘타고난 나’, ‘학습된 나’의 힘으로 하는 게 절대로 아니다. ‘의식하는 나’의 힘도 아니다. 오직 ‘거듭난 나’의 힘이다. 그래야 능력이 있다. 변화가 있다. 오래간다. 행복하다. 물질, 명예, 권세로부터도 초연해지고, 열등감과 쌓인 분노로부터도 자유롭다. 내가 받은 불행과 상처도 성도들에게 대물림하지 않는다.
김종훈 목사
오산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