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는 엠마오 현현 사건에 담긴 신학적 의미를 고찰하고 있다. 누가는 이 사건을 통해 부활의 주님께서 제자들의 어두웠던 영적인 눈을 여시고 그들로 하여금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보게 하기 위해 하신 일이 무엇인가를 세 가지로 제시했다.
부활의 예수께서 두 제자의 영적인 눈을 여기기 위해 하신 두 번째 일은 그리스도의 수난과 부활에 관하여 구약에 “기록된 말씀들”을 그들에게 자세하게 설명해주는 일이었다: “이에 모세와 및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바 자기에 관한 것들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눅24:27).
그리스도의 수난과 부활이 구약에 기록된 말씀들에 기초해 일어났다는 것과 그래서 그리스도의 수난과 부활을 마음에 믿는 믿음도 그 말씀들에 기초해야 한다는 누가의 입장이 부활현현 이야기들에서 모세와 예언의 말씀들과 성경에 대한 반복적인 언급에서 분명하게 나타난다(눅24:25, 27, 32, 44, 45, 47).
엠마오 이야기에서 선지자들에 대한 언급(눅24:25)과 모세와 선지자들에 대한 추가적인 언급(눅 24:27)은 제자들이 메시아가 반드시 고난을 통과하여 그의 영광에 들어가야 한다는 필연성을 성경으로부터 인식했어야 한다는 것을 말해준다.
구약 성경에 여호와의 종의 고난에 관해서는 나오는 반면(사52:13~53:12) 메시아의 고난에 대한 직접적인 언급이 없기 때문에, AD 1세기 유대인들은 대다수가 고난 받는 메시아를 기대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부활현현과 성령강림을 체험한 사도들은 성령의 감동을 따라 예수 그리스도의 공생애 전체 특히 그의 수난과 부활이 예언의 성취로 이루어진 것을 알게 되었다.
사도행전 1장에 따르면, 사도들이 성령강림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깊이 알게 된 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공생애 전체가 기록된 말씀의 성취라는 것과 심지어 열 두 제자 중 한 사람이었던 가룟 유다가 예수를 배반한 비극적인 사건조차 성경의 성취로 이루어졌다는 것이 부각된다.
누가는 그의 복음서에서 이미 그리스도의 수난과 부활을 암시하는 구약의 말씀들을 여러 번 제시했다: 누가복음 20:17(시118:22); 20:42~43(시110:1); 22:37(사53:12); 23:34b~35(시 22:7, 8). 여기에 인용된 말씀들과 다른 말씀들이 사도행전에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셨지만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복음선포에서 제시됐다(행2:25~28, 34~35; 4:11, 25~26; 8:32~33).
누가는 부활현현 이야기들에서 부활의 예수께서 제자들을 위해 행하신 중심적인 일은 그리스도의 수난과 부활이 구약에 기록된 말씀들에 기초해 일어났다는 것을 설명해주시고 또 그래서 그 말씀들에 기초해 그리스도의 수난과 부활을 그들의 마음에 믿게 하려는 것임을 강조한다.
누가는 특히 ‘모든’이라는 형용사를 두 번이나 복수형으로 사용하여 “모든 예언자들이 기록한 것들”(avpo. pa,ntwn tw/n profhtw/n)과 “모든 성경들”(evn pa,saij tai/j grafai/j)에 기록된 “그리스도에 관한 것들”(ta. peri. e`autou/)이 다 성취된 것을 부각시킨다.
누가는 나중에 제자들의 고백을 통해 부활의 주님께서 그들에게 “성경을 풀어주셨다”라고 말했을 때에도(눅 24:323) ‘성경들’(ta.j grafa,j)이라는 복수형을 사용함으로써 누가복음 24:27에서와 같이 부활의 주님께서 그리스도의 수난과 부활에 관한 “성경의 모든 말씀들”을 자세하게 해설해주신 의미를 전달한다.
이것은 바울이 그가 고린도교회에 전파한 복음을 요약적으로 제시하는 자리에서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이 ‘성경대로’(kata. ta.j grafa.j)로 이루어진 사건이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성경대로’라는 어구를 두 번이나 사용한 것과 연결된다(고전15:3, 4).
거기서 바울도 ‘성경들’이라는 복수형으로 사용하여 성경들에 기록된 모든 것들이 성취된 것을 강조적으로 표현했다. 누가는 사도 바울의 이러한 신학적 유산을 기초하여 자기 시대의 기독교인들을 향해 그리스도의 수난과 부활이 “기록된 모든 말씀들의 성취”로 이루어진 필연적인 하나님의 역사라는 것을 믿어야 함을 강조했다.
“자세히 설명하다”(diermhneu,w)로 번역된 동사는 성령의 은사 중 하나인 방언을 ‘통역한다’는 의미로 사용되거나(고전14:5, 13, 27) 혹은 이곳에서와 같이 성경의 의미를 “명료하고 분명하게 해설하다”는 의미로 사용됐다. 부활의 예수께서 두 제자에게 성경들을 명료하고 분명하게 설명해주신 것이다.
부활의 주님께서 성경을 설명해주시는 것을 가리켜 신학적인 용어로는 “성령의 감동 혹은 조명”이라고 말할 수 있다. 부활의 주님께서 성경을 설명해주셨을 때 그들에게 일어난 결과가 그들의 눈이 열린 후에 그들의 고백을 통해 표현됐다: “그들이 서로 말하되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하고”(눅 24:32).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않더냐?”라는 제자들의 고백에는 ‘우리’라는 대명사가 두 번이나 사용되었다(직역: “우리 안에서 우리 마음이 뜨겁지 않더냐?”). 이것은 그들의 마음에 뜨거운 감동이 일어나고 그리스도의 수난과 부활에 관하여 분명한 것을 알게 된 그들이 크게 감격스러워 하는 장면을 나타낸다.
‘뜨겁다’(kaiome,nh)로 번역된 동사는 “빛을 비추다” 혹은 “불이 타게 하다”라는 의미를 갖는데, 여기서는 수동태 분사가 사용되어 그들의 마음에 계시의 빛이 비취고 성경 말씀의 의미에 대한 분명한 인식을 갖게 된 상태를 나타낸다. 특히 수동태 분사의 사용은 그들의 마음속에서 일어난 성경에 대한 뜨거운 감동이 주님의 역사하심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진 주권적인 은혜의 역사의 결과인 것을 나타낸다.
그들의 마음 속에 일어난 이러한 감동이 부활의 주님 자신의 역사하심으로 말미암아 일어나게 된 것이 그 제자들의 고백 속에 담겨있다. 그들의 고백에는 주님의 역사가 두 가지로 표현되었다: 부활의 주님께서 길에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는 것과 성경을 그들에게 풀어주셨다는 것이다.
이 구절과 누가복음 24:27을 연결시켜 생각하면, 부활의 주님께서 그들에게 성경을 “자세히 설명해 주셨다”는 것이 “길에서 그들에게 말씀하시는 계시”로 나타났으며 또한 “성경을 그들에게 풀어주시는 조명”으로 표현되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직접 나타나 그들에게 말씀하시는 것을 신학적 용어로는 ‘계시’(revelation)라고 부르며 또 성경을 풀어주신 것은 ‘조명’(illumination)이라고 부르는데, 이 두 가지를 합하여 “성령의 감동(inspiration)”이라고 부른다.
‘풀어주다’(dianoi,gw)는 동사는 “귀를 열어주다”(막7:34, 35), “눈을 열어주다”(눅24:31), 그리고 “마음을 열어주다”(눅24:45; 행16:14)라는 용례에서 보여주는 것과 같이, 신체의 귀와 눈을 열어 듣지 못하던 것을 듣게 하고 보지 못하는 것을 보게 함으로써 새로운 인식을 갖게 만들어주는 기본적인 의미를 갖는다.
이 동사의 더 중요한 의미는 신체의 귀와 눈을 열어주는 것을 비유로 하여 하나님의 역사에 관하여 성경에 감추어져 있던 것들과 보이지 않던 것들을 명료하게 해석하고 설명해주는 것을 가리킨다.
누가는 이 동사의 미완료 시제(dih,noigen)를 사용하여 부활의 주님께서 성경을 풀어주시는 행동이 계속적으로 이루어진 것을 나타낸다. 누가는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셨다”라는 구절에서도 ‘말하다’는 동사의 미완료 시제(evla,lei)를 사용함으로써 부활하신 주님께서 길에서 말씀하신 것도 계속적으로 이루어진 것을 나타낸다.
누가는 이와 같이 부활하신 주님께서 길에서 그들에게 계속해서 말씀하셨으며 또 그리스도의 수난과 부활에 관한 성경 말씀들에 담겨진 복음의 의미를 명료하고도 자세하게 해설해주셨을 때 그들의 마음속에 뜨거운 감동이 일어났으며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이루신 구원의 역사에 관한 믿음과 확신을 갖게 된 것을 표현했다.
부활의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보는 영적인 체험과 그것으로 말미암아 부활의 주님을 마음에 믿는 부활신앙이 부활의 주님 자신에 의한 계시와 감동에 의해 이루어졌다는 누가의 신학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대한 믿음과 선포가 성령의 감동에 의해 이루어진다는 바울과 요한의 교훈 및 신약의 다른 교훈들과도 밀접하게 연결된다(고전2:9~10, 12; 엡3:3, 5; 요14:26; 15:26; 16:13~15; 마16:16, 17).
김광수 교수 / 침신대 신학과(신약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