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아브라함, 이삭, 야곱 그리고 요셉을 족장이라 부르면서 믿음의 조상으로 여긴다. 그들의 생애는 믿음의 관점에서 우리에게 교훈을 준다. 특히 목회자의 삶과 사역의 단면을 교훈적으로 보여준다. 이삭에 대해 살펴보자.
사실 이삭에 대해서는 그다지 강조되고 있지 않다. 그만큼 어떤 면에서 평탄하고 굴곡 없는 삶을 살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목회자 가정에서 태어나 큰 문제없이 자라 아버지의 대를 이어 목회자의 길을 걷고 있는 사람이라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자세히 살펴보면 그에게도 의미 있는 사건들이 점철되고 있다.
우선 이삭은 약속으로 주어진 자녀였다. 나이가 들었는데도 후사가 없는 아브라함과 사라에게는 아들에 대한 염원이 컸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아들을 약속하셨다(창18:10). 불가능해 보이는 것을 약속하시는 하나님 앞에서 그들은 기가 막혀 웃었지만 여호와께서는 약속을 지키셨다.
잠시 인간적인 의욕이 앞서서 이스마엘을 후사로 여기고자 하는 실수도 있었지만 여호와 하나님은 약속의 자녀로 이삭을 주셨다(갈4장). 모든 목회자는 하나님의 약속된 자녀이다. 하나님께서 만세 전에 택하시고 섭리 가운데 인도하셔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세우시는 사람이다.
이삭은 또한 갈등을 극복한 사람이다. 갈등은 온전치 못한 인간들의 상호관계에 있어서 피할 수 없는 상황이다.
이삭은 이스마엘과의 갈등을 경험했다(창20:9). 또 창세기 26장 12절 이하에 보면 이삭이 농사하여 하나님의 복 주심으로 인해 큰 부자가 되었을 때 주위 사람들의 시기를 받아 우물을 메우기도 하고 빼앗기도 하는 등 충돌이 벌어졌을 때 이삭은 조용히 물러나고 양보하고 가능하면 다툼을 피하는 삶의 태도를 가졌다.
이러한 갈등 극복을 위한 노력은 이삭을 더욱 경건하고 평온한 삶으로 이끌었다. 조금 양보하고 손해 보면 된다. 그런다고 큰 일 나는 것도 아니다. 목회자는 가능한 갈등상황이 야기되지 않도록 노력해야 한다.
이삭은 제물로 드려진 사람이다(창22장). 성경에서 가장 드라마틱한 장면 중 하나를 꼽는다면 이 장면일 것이다. 아브라함은 이삭을 끔찍이 사랑했다. 그런데 사랑하는 아들을 제물로 바치라는 하나님의 명령이 떨어졌다.
아브라함은 이삭을 제물로 드리기 위해 모리아 산으로 갔다. 그는 정말 제물로 드릴 참이었다. 칼을 잡고 아들을 바치려는 순간 하나님께서 막으시고 대신 수양을 제물로 받으셨다. 이 때 이삭은 하나님께 드려진 존재가 된 것이다.
모든 성도가 제물로 드려진 존재이지만(롬12:1), 목회자는 더욱 더 드려진 존재이다. 제물로 드려진 사람은 제물로서 살아야 한다. 사도 바울은 자신을 전제(관제)로 드린다고 했다(빌2:17). 예수님은 마지막 피 한 방울, 물 한 방울까지 다 쏟으시어 제물이 되셨다.
목회자는 자신의 감정, 인간적인 욕심, 자기만족, 명예, 자랑, 안락함 등등 모든 것을 내려놓고 제물로서의 인생관을 가져야 한다.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 이제 나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다. 나는 사나 죽으나 그리스도를 위하여 산다.”는 생활태도가 필요하다.
이삭은 묵상하는 사람이다(창24:63). 묵상은 인간을 자신이 처한 상황에서 한 발자국 떨어지게 만든다. 자신을 객관적으로 볼 수 있게 한다. 묵상은 우선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깊은 통찰이다. 그리고 넓게는 하나님께서 보여주시는 것, 들려주시는 것, 경험하게 하시는 것, 느끼게 하시는 것에 대한 관찰이고, 이런 것에서 얻어지는 교훈과 원리를 자신에게 비추어 봄으로서 새로워지고 나아지고 앞으로 나아가기 위한 성찰이다.
그러므로 목회자는 묵상 없이 생각하고 말하고 움직일 수 없다. 묵상을 통해 얻어지는 지혜로 행동원리를 삼아야 한다. 이삭은 묵상함으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기다렸다. 그는 묵상함으로 인생을 세워나갔다. 묵상을 통해 열려지는 삶의 자리는 흔들림이 없다. 일시적인 충동이나 상황에 따른 임기응변에 휩싸이지 않는다. 상황이 이끌어가는 삶이 아니라 원칙에 의해 경영되는 삶을 산다.
이삭도 한 인간으로서 아내를 누이로 속이고 의기를 모면하려는 시도를 하기도 했다. 아버지 아브라함이 했던 것과 똑같은 행위를 반복했던 것이다(창20장과 26장 비교). 아버지의 등을 보며 자란 이삭도 그렇게 했다. 우리는 은연중에 우리 아버지의 어떤 모습을 반복한다. 그리고 우리의 모습은 우리 자녀의 삶 속에 반복된다. 그래서 우리의 일거수일투족이 무서운 거다.
목회자는 항상 자신의 삶이 선악 간에 카피되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일차적으로는 자녀들이, 그리고 교인들이 복사하고 있다. 어떤 교회가 그런 교회인 것은 십중팔구는 그 교회 목사가 그러하기 때문이다. 이삭은 에서와 야곱으로 인하여 편치 않은 상황을 맞기도 했다. 하나님의 섭리 중 야곱에게 장자의 축복을 했다. 결과적으로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이었지만 과정은 순탄치 않았다. 좌우간 목회자는 자식 농사 잘해야 한다.
그러나 이삭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 하시는 것이 분명히 보이는 삶을 살았고 여호와께 복을 받은 사람이었다(창26:28~29). 이삭같은 우리, 이삭같이 되지 말고, 이삭같이 되자.
이명희 교수
침신대 신학과
(실천신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