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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 우상숭배

 

2002년 미국 의회가 전화기의 최초 발견자를 알렉산더 그레이엄 벨에서 안토니오 뮤치로 수정 발표했지만 일반적으로는 1876년 벨이 최초 전화 발명자로 알려져 있다. 그렇게 시작된 전화의 역사는 여러 과정을 거쳐 1980년 대 휴대폰 시대를 연다. 집에서 거리로, 고정에서 이동으로 변신을 한 것이다.

 

처음의 휴대폰은 크기나 편리성에서 여러 가지로 불편했지만 점점 진화해 1993IBM의 흑백스마트폰을 거쳐 2008년 애플의 2G3G로 업그레이드 된 아이폰과 2010년 안드로이드를 기반으로 한 삼성의 갤럭시S가 출시되면서 인터넷 웹서핑과 각종 검색, SNS 등 휴대폰의 활용 영역이 모든 삶의 영역으로 확대됐다.

 

최근에는 지문인식과 안구인식의 기능을 하는 능력까지 발휘하며 세상을 향해 그 거만한 혀를 날름거린다. 이렇게 세계가 스마트폰의 지배를 기꺼이 수용하는 가운데 우리나라는 인터넷과 함께 휴대폰 보급률 및 교체율에 있어 당당히 세계 1위를 고수하며 달리고 있다.

 

이는 거의 종속 및 지배수준이다. 이제 휴대폰은 없어서는 살 수 없는 우리 생활의 절대필수품이 되었다. 리모컨으로 TV 채널을 마음대로 돌려대듯이 휴대폰은 단순한 통화기능에서부터 대부분의 분야에 적절하게 활용되어지고 있다. 사용자가 원하는 것은 거의 처리해 주는 초능력을 지닌 놀라운 존재가 됐다.

 

사무실이나 집이 아닌 거리에서, 자신이 현재 있는 곳에서 자신이 하고 싶은 일들을 손 안에 들어온 깜찍한 스마트폰 하나로 척척 처리한다. 많은 부분에서 매우 실용적이고 능률적이다. 이 경이로울 정도의 물건은 이렇게 전 세계 곳곳으로 그 세력을 확장해 가고 있다. 이제 사람들은 부모나 친구 없이는 살아도 스마트폰 없이는 살 수 없게 됐다.

 

이렇게 휴대폰은 매우 다양한 영역에서의 순기능들을 가지고 있다. 오래전부터 전기 없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세상이 되었듯이 지금은 휴대폰 없으면 아무거도 할 수 없는 세상이 됐다. 어른들만 소지하던 휴대폰은 출생하면서부터 경험하는 세상의 경이로움 그 자체로 휴대폰은 어느 새 사람과 불가분의 관계가 됐다.

 

그러다보니 순기능만큼이나 역기능들도 늘어가고 있다. 전 국민 대부분이 소지하고 있다 보니 휴대폰은 의식주나 다름없게 됐고 그로 인한 개인적, 사회적 문제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이미 인지하고 있는 것처럼 휴대폰은 단순한 통화에서 찍는 카메라 기능이 결합되면서 카메라폰으로 인한 성적 범죄와 인권적 침해에 악용되기도 하는가 하면, 휴대폰 중독이라는 신종 중독으로 정신적 피폐를 가져오고 있다.

 

최근 호주 퀸즐랜드 대학의 조사에 의하면 휴대폰에 중독된 사람은 마치 알코올이나 마약중독자처럼 불안해하고 금단 증상까지 보이는가 하면 휴대폰을 강제로 끄기라도 하면 심적인 동요를 일으키고 전화나 문자메시지가 오지 않으면 자존감이 상한 것처럼 행동하며 자기 비하를 일삼는다고 한다.

 

이렇게 한 사람의 정신을 깨뜨려 놓을 정도로 심각한 휴대폰 중독은 그 어느 나라보다 우리나라가 더욱 심각하다. 특히 우리나라의 청소년 휴대폰 중독의 심각한 수준은 세계적으로 가장 높은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다수의 청소년들은 전화기를 갖고 있지 않으면 불안감을 느끼고, 다른 사람의 벨 소리를 자신의 벨 소리로 착각을 하거나 환청을 겪기도 한다고 한다.

 

한국정보문화진흥원의 조사에 따르면 이런 중독에 시달리는 청소년이 25.7%이고, 주의 사용자는 39%라고 한다. 건전 사용자는 3분의 1수준인 35.5%에 불과하다고 한다. 휴대폰에 중독된 사람들의 평균 사용시간은 하루 평균 367.61분으로 비중독자의 209.10분보다 160여분이나 더 많은 것으로 나타났다.

 

그래서일까 며칠 전 미 CNN은 한국의 풍경과 특징으로 스마트폰과 일중독의 나라라고 꼬집은 것이 왠지 유쾌하지 않다. 이처럼 휴대폰을 이제 단순한 소지와 통화를 위한 것이 아니다. 휴대폰은 자신의 정신적 안정과 불안을 가름하는 것으로 손에서 놓을 수 없는, 놓아서는 안 되는 물건, 존재, 가치, 신앙이 됐다.

 

여러 사람이 한 자리에 모여 앉았어도 대화는 없고 자기의 휴대폰을 들여다보며 게임을 하거나 문자를 하거나 인터넷을 검색한다. 대화를 위해 만들어진 것이 대화를 불필요하게 만들고 있는 것이다. 만약에 정부가 어느 한 날을 정해놓고 그날만큼은 휴대폰 사용할 수 없게 하며 아마도 난리가 나고 시위를 벌이고, 심지어 이상한 범죄를 저지르며 자살하는 소동까지도 벌일 것이라는 것을 예상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이렇게 엄청난 휴대폰은 이제 신앙의 차이는 있지만 각자의 신() 아닌 신()이 되어 있다.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이 아닌 반드시 있어야 하는 신적(神的) 존재인 것이다. 돈신인 맘몬을 팔아 폰신을 섬긴다. 이러한 불편한 풍조는 거룩하신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리에까지 들어와 예배자의 마음을 소리 없이 도적질하고 있다.

 

오늘의 예배 풍경은 이전의 예배풍경이 분명 아니다. 예배 중에 이곳저곳에서 휴대폰 벨 소리가 울리는 것은 보통이고, 예배를 드리는 중에도 성경은 없어도 휴대폰은 있어야하고, 찬송이나 기도 그리고 설교하는 중에는 휴대폰 자판을 보지도 않고 두드리는 엄지족 신자가 된다. 고개를 숙인 채 휴대폰을 열심히 예배한다. 심지어 예배 중에 목사의 휴대폰이 주인을 찾아 소리 지르는 웃지 못 할 풍경도 종종 있곤 한다.

 

 성도는 말할 것도 없고 목사들마저 휴대폰을 손에서 내려놓지 않는다. 그뿐이 아니다. 전화나 문자가 오지 않아도 수시로 휴대폰을 열고 들여다본다. 물론 휴대폰이 목회적 순기능이 없는 것은 아니다. 휴대폰의 다기능들은 목회의 정보를 비롯해 많은 도움을 주기도 한다. 하지만 과유불급이라고 했다.

 

어느 새 휴대폰은 목회자와 성도를 넘어 예배의 한 부분이 되어 있는 안타까움을 지금 우리는 경함한다. 목사도 성도도 휴대폰의 신자들이다.

 

양심의 가책도 없이 책임은 시대에게 전가하며, 무뎌진 영적 상태로 폰신을 뜨겁게 열심히 경배한다. 그렇게 휴대폰은 비 그리스도인들은 물론 그리스도인들과 심지어 목회자들의 신으로 영광을 받는다. 하나님 외의 다른 신으로, 아무런 의식도 없이 손에 쥐고 사는 사이 휴대폰은 내게 하나님과 다를 바 없이 섬겨진다.

 

그래서 절제와 분별력, 오직 하나님에 대한 절대적 충성, 다시 십자가 앞으로, 다시 복음 앞에 서라, 휴대폰과의 적절한 거리를 두는 결단과 지혜를 가지라는 간절한 요청이 별 의미 없게 되곤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외쳐야 하겠다. 우상숭배하지 말라고 강단에서 외치기 이전 이미 목회자인 내 안에 들어와 자리를 굳게 잡은 휴대폰 신을 깨뜨리는 영적 결단을 하라고 말이다.

 

다시 벧엘로 올라가는 야곱의 심정으로 내 안에 들어와 주인처럼 된 폰신을 제거해야만 주님의 참된 종이 되고 시대적 소명을 감당하게 된다. 지금 당신의 손과 곁에 있는 것은 무엇인가? 성경인가 아니면 휴대폰인가?

 

계인철 목사 / 광천중앙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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