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마태복음 5장 8절의 “하나님을 볼 것이요”는 시대별로 다양한 해석 변천 과정을 거쳐 왔다. 3세기 영지주의자들은 ‘하나님을 보다’를 종말론적 관점에서 해석했다. 영적인 해석은 우화적 해석이 팽배한 시대의 산물이다.
헬라 철학이 활발하게 전개되던 시대에는 ‘하나님을 보다’를 성화 관점에서 해석했다. “하나님을 보다”를 종말론, 영적 그리고 성화의 관점에서 해석한다고 해도 그 의미는 모든 시대를 망라해 하나님의 가시적이고 종말적 현현을 상징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러한 해석 경향들은 여전히 마태복음 5장 8절의 “하나님을 볼 것이요”를 해석하는 데 직간접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다.
III. 유대교와 신약 성경의‘하나님을 보다’
앞 단락에서 살펴본 마태복음 5장 8절 “하나님을 볼 것이요”의 해석 결과는 하나님은 가시적으로 볼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고 주장하고 있음을 드러냈다. 그렇다면 구약성경을 비롯한 유대교와 신약성경은 ‘하나님을 보다’를 어떻게 묘사하고 있는지를 살펴보자.
유대교 관점이란 구약성경과 1세기 유대교 사상 전체를 포괄하는 의미로 사용할 것이다. 신약성경에서란 마태복음을 제외한 다른 성경에서 ‘하나님을 보다’가 어떻게 묘사되어 있는지를 의미한다.
1. 구약과 유대문헌
유대문헌은 ‘하나님을 보다’를 다양하게 묘사한다. 첫째, 구약성경은 하나님의 현현을 대체로 비가시적인 측면에서 언급하고 있다. 인류는 전능하신 하나님에 의해 그분의 형상을 따라 창조됐다(창 1:26~27). 하지만 창조 설화는, 인간은 하나님을 대면해 볼 수 없는 존재임을 부각시킨다. 따라서 피조물인 인간은 창조주 하나님을 가시적으로 볼 수가 없다.
더욱이 모세가 시내산에서 십계명을 받기 위해 하나님 앞에 섰을 때도 하나님의 얼굴은 보지 못하고 등만 보았다(출 33:23). 물론 신명기 34장 10절은 “모세가 하나님을 대면해 본 자”라고 기록한다. 하지만 모세가 하나님을 대면해 보았다는 것은 육체적 대면이라기보다는 하나님을 깊이 알고 있다는 영적인 측면으로 이해하려는 경향이 있다.
신명기 기자가 모세를 이렇게 영적인 지도자로 묘사한 것은, 그가 하나님의 뜻을 이스라엘 공동체에 전달하는 대리자였기 때문일 것이다. 따라서 시내산에서 모세가 하나님을 대면한 사건 역시 문자적으로 받아들이기보다는 하나님과의 영적인 관계를 강조한 문학 표현으로 보아야 한다는 주장이 있다. 고대 지중해 사회에서 이러한 신적 현현 사상은 일반적인 것으로 간주되곤 했다.
당시 사람들은 하나님을 얼굴로 직접 대면할 수 없는 분으로 인식했고, 하나님의 모습은 인간의 형상과 같았을 것으로 추정했다. 그리고 신명기 34장 10절은 ‘하나님을 보다’를 미래적 관점에서 설명하고 있다. 즉 하나님을 현실에서 가시적으로 만날 수 있는 분이 아닌 미래 어느 시점에서 만날 수 있는 분으로 묘사한 것이다. 결국 모세오경은 하나님을 직접적으로 대면할 수 없는 분으로 묘사한 경향이 있다.
반면에 시편에 묘사된 하나님의 현현은 모세오경에 그려진 모습과는 차이가 있다. 시편 24편 3절은 하나님의 산에 오를 자와 거룩한 곳에 설 자가 누군가라고 질문한다. 시편 기자는 이에 대해 “마음이 청결한 자”라고 대답한다(시 24:4~6; 참조, 시 51:10; 73:1).
마음이 청결하다는 것은 마음의 중심인 생각과 동기가 깨끗하다는 것이다. 시편 기자가 마음이 청결한 자를 언급한 것은 마태복음 5장 8절과 같은 맥락에서 이해해야 할 것이다. 아마도 마태복음 기자가 시편 24편을 인용한 것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시편 기자는 하나님의 가시적 현현을 미래적 사건으로 보려고 한다. 이것은 하나님의 가시적 현현 경험을 미래에 나타날 사건으로 보는 것이며, 이러한 미래적 사건의 예비로 현재 마음이 청결한 자는 영적으로 하나님을 직면하게 될 것이라고 주장한 것 같다.
따라서 시편 24편 역시 모세오경처럼 하나님의 가시적 현현을 영적으로 가능하다고 본 것이고, 시편 기자는 하나님의 가시적 현현을 미래에 일어날 사건으로 묘사했다.
신인철 교수
침신대 신학과
(성서신학/신약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