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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들 하십니까?

 

지난해 끝에서 우리 사회의 현상을 한 마디로 표현하면서 분출한 것이 있었다. 한 대학생의 사회를 바라보는 눈과 의식이 녹아서 표현된 안녕들 하십니까라는 주제의 대자보가 바로 지난해의 시대상을 군더더기 없이 그대로 적절하게 표현하며 사회의 큰 방향을 불러온 사건이다.

 

이후 각 대학들과 다양한 계층과 지역에서 안녕하십니까?’라는 질문들을 통해 오늘의 우리들의 자화상을 노출시키며 감추어져 있던 욕구들을 분출함으로 그동안의 과격한 시위보다도 더 폭발력 있게 그 위력을 실감케 했다. 이는 이 땅에 사는 사람이라면 세대를 불문하고 스스로 88만원 세대라고 밝힌 그의 묻고 싶습니다. 안녕하시냐고요. 별 탈 없이 살고 계시냐고요그것이 무슨 내용이든지 말입니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묻고 싶습니다. 모두 안녕들 하십니까!”라는 말에 공감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의 불편한 지적대로 안녕하지 못한 것에 대해 소리라도 쳐야 했는데 소리는 고사하고 그저 죽은 채 하고 살아야 했던 이 땅의 나약한 자들을 대신한 그의 한 방에 은근히 카타르시스(catharsis)같은 쾌감을 느꼈다.

 

문제는 새해가 됐음에도 여전히 이 땅의 우리들은 안녕하지 않다는 것이다. , 보수 이념에 따라 보는 시각이 다를 수도 있고, 그래서 안녕의 여부도 같은 것이라도 다를 수 있지만 객관적으로 우리 사회의 일상은 변함없이 안녕하지가 않다.

 

어쩌면 올해가 지난 해 보다 더 안녕하지 못할지도 모르겠다. 이것은 한국 기독교에 요청된 시대적 과제에 직면한 난관이기도 하다. 안녕하지 못한 상황을 안녕한 상황으로 변화시켜야 하는 교회의 기능을 십분 발휘해야 하는 사명이 우리에게는 있다. 그런데 사실 걱정이다.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어 안녕치 못한 곳을 안녕하게 해야 할 교회가 도리어 안녕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언제부턴가 맛을 잃은 소금으로 이 땅에서 천덕꾸러기로 전락해 가는 집단이 종교집단이고 그 중에서도 기독교가 대표적 밉상이다.

 

이렇게 매력 없는 종교로 믿고 싶지 않은 종교가 된지는 이제 꽤나 오래됐다. 한국 교회를 대표하는 목사들과 단체들이 저마다 헛발질만 해 대며 반칙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해 일을 새해에까지 끌고 와 새해를 더럽히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지만 그것이 지난해에 모두 끝난 것이 아니라 새해에도 진행되고 있는 것이라 속이 뒤틀려지지만 도리가 없다.

 

이미 지상파 방송의 알만한 프로그램에 집중적으로 취재되어 보도된 한국과 세계에서 제일 큰 교회의 원로목사가 방송국도 우리 사회도 아닌 한 교회 내에서 둘로 나뉘어 법정을 오고가며 벌이는 진실게임들은 보다 못해 역겹기까지 하다. 수만의 성도를 거느린 모 교회의 한 원로목사의 얼굴 붉히는 스캔들은 사실여부를 떠나 배신감마저 든다.

 

입만 물 위로 내 밀어 거룩하라고 외치고, 물속에서 몸뚱이는 몸의 본능에 충실한, 타락한 삶은 아무리 아니라고 부인해도 부인되어지지 않는다. 더 안녕치 못한 것은 썩은 나무도 재목이라고 그 나무 그늘에서 그 나무를 지지하며 대변하는 무리들의 의식구조다. 그뿐이 아니다.

 

한국 기독교의 대표라고 스스로 말하지만 금품선거로 등으로 돈기총으로 조롱당하는 모 단체는 이단 풀어주기 경쟁을 하기라도 하듯이 치매환자 노릇을 하고 있다. 결국에는 회장이 속한 주교단마저 탈퇴하고 일부 교단은 물론 일부 단체들이 앞 다투어 탈퇴 행렬에 속속 합류하고 있다.

 

금권선거, 세습, 재정의 불투명에서 자연스럽게 이뤄지는 공금횡령, 성폭력 등 사회에서도 비난의 대상이 되는 것들이 오늘의 한국 교회 안에서 한 자리씩 차지하고 그 위세를 몰아 세상의 조롱 박수 속에 그 영역을 전 교회로 확장해 가고 있다.

 

아직은 일부분이지만 이미 기독교는 개독교가 되어 가고 있다. 속빈 강정, 빛 좋은 개살구처럼 겉은 여전히 거룩하지만 속은 고목나무처럼 썩어 문드러지고 있다. 그래서 묻는 것이다. ‘한국교회는 안녕합니까?’, 이글을 읽은 당신 교회는 안녕하십니까?’ 물론 필자도 스스로 묻는다.

 

너는 이렇게 말 할 만큼 안녕한가?’ 당연히 부끄럽다. 앞서 언급된 목사들만큼은 아니지만 빛과 소금으로 세상에서 복음의 능력을 나타내지 못하는 것은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사회의 도덕적인 기준으로는 조금 나을지 모르지만 우리의 정체성과 본질의 기준으로는 매 한가지이기 때문이다. 갈수록 늙어가는 우리 사회에서 교회의 필요는 점점 커지는데 그 필요를 채워주기도 전에 교회가 먼저 늙고 병들어 죽게 생겼다.

 

안녕치 못한 세상을 안녕하게 만들어야 할 교회가 안녕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복음의 능력으로 세상에서 전도와 선교의 순기능들을 감당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교회로 밀려드는 세상의 쓰레기들에 도리어 더렵혀지고 물들어 가는 오늘의 우리 교회는 안녕하지 못하다. 이런 현실 앞에서 어쩔 수 없지라며 스스로 물러서고 패배주의로 전락하는 우리의 실상은 안녕치 못함을 넘어 측은하기까지 하다.

 

광야의 침례 요한의 외침이 절실한데 침묵으로 일관하며 스스로 합리화시키며 죄에서 벗어났다고 믿는다. 불의 앞에 침묵하는 정의는 분명 범죄다. 그럼에도 한국교회의 다수 목회자와 성도는 이러한 세상과 교회의 모습에 침묵한다.

 

안녕이 기독교의 마음임에도 그 마음을 누리지 못하는 현재를 염려하기에도 이제는 지치는 듯하다. 누구를 책망하고 비난하는 것이 아니다. 이런 교회를 비난하며 조롱하는 세상을 원망하고자 함도 아니다. 이런 안녕치 못한 우리의 모습 앞에서도 침묵하고 스스로 합리화 하며 무죄를 주장하는 그런 우리자신이 슬픈 것이다.

 

개소리는 들려도 새소리는 들리지 않는다며 스스로 나 혼자나 잘하면 된다고 중얼거리며 불의에 눈감아 버린 침묵의 내가 싫은 것이다. 더 속상한 것은 이런 우리와 한국교회를 보시며 안녕치 못한 주님 때문이다. 우리는 현장에 없었던 공범이지만 세상의 빛으로 오셔서 세상의 빛이 되신 주님은 정말 안녕하지 못하실 것이다. 문득 이 말씀이 생각나는 것은 나의 고통일까, 성령의 감동일까?

 

땅위에 사람 지으심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 이르시되 내가 창조한 사람을 지면에서 쓸어버리되이는 내가 그것들을 지었음을 한탄함이니라”(6:6,7)

 

올 새해에는 주님으로 하여금 교회 때문에 한탄하지 않으시는, 정말 안녕하셨으면 좋겠다. 이를 위해 더 이상 예수님이 아닌 교회 건물이나 다른 어떤 것들이 교회의 주인이 되지 않았으면 좋겠다. 오직 예수만이 교회의 주인이 되고 그 주인에서 죽도록 충성하는 종 된 교회만이 주님을 안녕하시게 할 수 있으니 말이다.

 

계인철 목사 / 광천중앙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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