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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과 초대교회의 본고장 ‘터키’로!-3

혼란과 혼돈의 초기 기독교

 

콘스탄티누스 이후 테오도시우스 황제는 380년에 반포한 종교칙령에서 거룩한 삼중성 안에 계시는 성부, 성자, 성령의 하나인 신성에 대한 신앙을 받아들이라고 했다. 381년 제 2차 종교회의인 콘스탄티노플 종교회의가 이레네 교회(톱카프 궁전 안에 있음)에서 열린다.

 

이 교회는 4세기 초까지 아프로디테의 신전이었다가 교회로 개조됐다. 마체도니우스파들이 성령의 신성을 거부한다.

 

성령은 단지 봉사하는 영, 하나님의 해석자, 천사적 존재 중의 왕으로 보았다. 이에 갑바도기아 교부들은 성령의 신성 또한 밝힘으로 성령은 피조물이 아니며 성부와 성자와 동일한 실체라고 주장했다. 여기에서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경이 확정된다.

 

주님이시며 생명을 주시는 성령을 믿나니, 성령은 성부에게서 좇아나시며, 성부와 성자와 더불어 같은 흠숭을 받으시고 같은 영광을 받으시며 예언자를 통하여 말씀하셨나이다라는 구절이 첨가 된다. 이를 통해 삼위일체 교리가 확정된다.

 

니체아 공의회(325)와 콘스탄티노플 공의회를 통하여 삼위 일체론이 신학적으로 규명되자, 교리의 초점이 그리스도론에 집중된다. 안디옥 학파였던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 네스토리우스(428)가 마리아는 하느님의 어머니(theotokos)’로 불릴 수 없고 다만 한 인간 예수를 낳은 한에서 단순히 그리스도의 어머니(christotokos)’에 불과하다는 결론을 내려 이에 두 학파의 논쟁이 시작되었다.

 

최종적으로 니케아에서 결정된 니케아 신조를 재확인한 이 회의에서 마리아에 대한 하나님의 어머니칭호는 적합한 것으로 인정되어, 잠정 조치로나마 네스토리우스는 배척당했다.

 

에베소공의회로 생겨난 갈등을 해소하기 위해 433년에는 알렉산드리아 학파와 안티오키아 학파가 네스토리우스의 파문을 받아들이고 합동 신조를 발표하면서 키릴루스 일파와의 화해가 이루어졌지만, 네스토리우스는 테오도시우스 황제에 의해 아라비아의 페트라로 추방당했고 451년 수도원에서 한을 풀지도 못하고 죽었다.

 

그의 신학을 따르는 중동 등 동방 지역에서 선교 활동과 신학 교육을 벌였으며, 중국에까지 전해져 경교(景敎)라는 이름으로 성행했다. 오늘날 네스토리우스파는 이라크의 아시리아 동방 교회 및 그 분파인 인도의 토머스 교회(마라발파)로 계승되고 있다.

 

시간이 흘러 콘스탄티노플에 있는 욥 수도원의 노사제 에우티케스가 예수는 신성과 인성 두 품성을 지니신 것이 아니라 한 품성만 지니셨다는 단성론을 주장한다. 논란이 일자 마르키아누스 황제는 451년 칼케돈(오늘날 카디쿄이)의 성녀 에루페미아 교회(지금은 하이달파샤 기차역이 있고, 교회로 가까운 곳으로 이전했음)에서 제 4차 종교회의가 열린다.

 

여기에서 하나이요 동일한 그리스도는 본성이 둘이면서 뒤섞이거나 뒤바뀌거나 나뉘어지거나 갈라지지 않는 분으로 고백해야 한다. 이 일치를 빙자하여 본성들간의 구별이 말살되어서는 아니 된다. 오히려 이 두 본성의 독특한 고유성이 고스란히 보전되어야 한다. 이 두 본성은 한 위격과 한 위격 안에 결합되어 있다.”라며 예수님의 양성교리를 선포한다.

 

하지만 종교회의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5, 6차 종교회의 콘스탄티노플 성 소피아 교회에서 그리스도의 단성론과 단의론에 대하여 그리고 7차 종교회의가 니케아 소피아 교회에서 성화상을 놓고 벌어진다.

 

이런 종교회의의 가장 큰 장점은 모든 교회가 신앙의 일치를 이루고 신학의 일치를 이루려 했다는 점이라면 단점은 교회의 분열과 순수한 신앙의 파괴를 이루었다고 볼 수 있다.

 

카톨릭 신학자 한스큉은 그의 저서 그리스도교 본질과 역사에서 그리스도교 신앙이 소박하고 알기 쉬운 복음서에 멀어지고 복잡한 삼위일체 사변이 생겨났다. 세 분이 어떻게 하나일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도 성부는 낳아지지 않았음성자는 낳아졌음성령은 좇아나옴이라는 동사만으로 형식 논리적으로 해결할 수 있었을 분이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사는 삶이 아니라 공의회에서 선포한 교리에 대한 지적 승인이나 믿음으로 판단하게 되었다라고 비판한다.

 

지나친 교리논쟁에 치우친 교회, 세속화와 권력의 시녀가 된 교회, 제도화가 된 교회, 성직자와 평신도가 구분되어진 교회가 만들어진 것이다. 웃습게도 이단으로 정죄 받았던 네스토리우스 교회는 중국을 넘어 한국까지 선교를 했다. 이런 교리적 논쟁에 치우치지 않았더라면 교회는 더욱 바람직하지 않았을까 생각해 본다.

 

이런 시기에 참 멋있는 목회자가 있었다. 그가 바로 요한 크리소스톰이다. 요한 크리소스톰은 349년 안티오키아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로마 군단의 장교였고 그가 어려서 죽었기 때문에 주로 어머니 밑에서 양육됐다. 법학과 수사학을 공부하면서 신학도 함께 공부했으나 결국 기독교에 헌신하기로 하고 은둔 수사가 되어 성서를 공부했다.

<다음에 계속>

 

엄 폴 선교사 / 침례교해외선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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