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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자는 통곡한다

 

엊그제 프란치스코 교황은 윤지충과 권상연을 비롯한 한국 천주교 창립 주역인 124명을 복자(福者)로 올렸다.

 

지난 1984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김대건 신부 등 103명을 성인(聖人)으로 추대한 이후로 한국 카톨릭계의 경사라 할 수 있다. 천주교의 복자는 성인 바로 다음의 반열로 신앙의 스승을 가리킨다.

 

1791년에 일어난 윤지충과 권상연의 순교 사건으로 천주교의 수난은 시작됐다. 윤지충은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외사촌 권상연과 상의해 어머니의 제사를 안 지내기로 하고 신주를 불태웠다. 당시 천주교의 가르침을 그대로 실천하여 제사를 지내지 않은 것이다.

 

이들의 신앙의 절개를 기념하기 위해 전주 풍남문 앞 전동성당에는 목에 형틀을 쓴 사람과 손에 십자가를 든 사람의 동상이 있는데 이들이 바로 윤지충과 권상연의 동상이다. 이 후 천주교의 박해는 계속 이어졌다.

 

그는 체포된 후 관아의 심문에 답하기를 사람이 죽으면 육신은 흙으로 돌아가고 영혼은 하늘나라로 가든지 지옥으로 갑니다. 죽은 이는 집에 남을 수 없고, 또 남아 있어야 할 영혼도 없습니다. 위패들은 아버지도 어머니도 아닙니다. 그저 나무토막에 불과 합니다. 어떻게 그 것들을 부모님처럼 여기고 받들 수 있겠습니까?”

 

천주교의 박해는 3대 교난(敎難)으로 정리된다. 1802년의 신유교난, 1839년의 기해교난, 1866년의 병인교난이다.

 

첫 번째 교난인 신유교난은 당시 권력층에서 소외되어 있던 남인계열의 양반계층 유학자들에게 천주교가 전파되면서 잉태되었다. 당시 정조의 묵인과 신임 받고 있는 남인계열의 실권자 채재공의 묵인으로, 계속 경기, 충청, 전라로 퍼져나갔다.

정조가 죽고 채재공 마저 죽게 되자 순조가 즉위하니 나이가 어리므로 증조모격인 정순왕후가 수렴청정하게 됐는데 정순왕후는 남인벽파로서 반대세력인 시파를 제거하게 되는데 그 정치 보복에 천주교가 희생양이 됐다.

이로 인해 주문모 신부와 황사영을 비롯한 300여명의 신자가 순교를 당하게 된다. 이 신유교난으로 경기, 충청, 전라지방에 분포됐던 천주교가 핍박을 피해 흩어진 신자로 인해 전국적으로 확산됐다는 것과 양반계급의 신자분포가 대중화, 서민화됐다는데 큰 의미를 둘 수 있다.

 

두 번째 교난인 기해교난은 1839년에 시작되어 1841년 약 3년간 이어졌다. 순조는 천주교에 관대했으며 아들 효명세자도 정사를 맡아 천주교에 관용정책을 폈다. 그러나 기해년의 교난은 엉뚱한 정치적 상황에서 잉태되고 있었다.

당시 안동 김씨 김조순의 딸이 순조의 비가 되자 안동 김씨가 세력의 전면에 나서 38년간 집권했다. 이 때 억눌려 권토중래(捲土重來)를 노리던 풍양 조씨 세력은 반대파의 세를 꺾기 위해 천주교를 탄압하기 시작했다.

헌종실록에 의하면 1839년 우의정 이지연이 사학을 멸하자는 주청을 올리면서 시작됐고, 결국 프랑스 신부인 맹베르 주교와 모방, 샤스탕 신부 등 기해일기에 기록된 79명 순교자가 명단에 올리게 됐다.

 

세 번째 병인교난은 1866년부터 6년간 계속됐다. 25대 조선왕에 오른 철종은 신유교난 당시 천주교와 관련되어 처형된 은언군의 손자로 천주교에 동정적 입장에 있었고 풍양 조씨 몰락으로 다시 안동 김씨의 득세로 천주교 정책은 묵인해 주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철종이 33세 나이로 죽자 다시 대왕대비였던 신정왕후가 흥선군 이하응의 둘째 아들 명복을 임금으로 세우니 그가 고종이다. 이때부터 프랑스의 북경 주재공사 벨로네와 해군제독 로즈는 조선이 성직자 처형과 천주교 탄압에 항의 하는 뜻으로 조선정벌을 결심하게 된다.

군함 4척을 동원하여 강화도에 상륙 공격하여 조선군과 전투를 벌였으나 양헌수가 이끄는 조선군에게 패퇴했고, 이로 인해 천주교의 박해는 더욱 심화됐으니 이 사건이 병인양요이다.

이어서 제너럴 셔면호 사건으로 미국의 로커스 제독이 아시아 함대를 이끌고 강화도로 침략하니 조선 방위군이 나서서 퇴각시켰다. 이 사건이 신미양요인 것이다. 이러한 일련의 사건이 외세의 간섭과 개입으로 판단한 흥선대원군은 더더욱 쇄국정책으로 이어지며 천주교인의 순교역사로 나타나게 됐다.

프란치스코회와 도미니코회가 제사가 우상 숭배임을 주장하자 오랜 논쟁 끝에 1742년 교황 베네딕토 14세는 최종적으로 금령을 내렸고, 1790년 베이징교구의 구베아 주교는 조선 신자들의 문의에 그 결정을 전했고 채 1년도 못 되어 희생자가 발생하게 됐다.

천주교의 3대 교난을 살펴보면서 한 가지 의구심을 떨쳐버릴 수 없는 것이 있다. 윤지충과 권상연의 순교에서 보듯 그들은 천주교가 조상에 제사하지 말라는 가르침에 따라 목숨을 걸고 신앙을 지켰다.

그런데 교황청은 1939년에 가서야 제사를 허용했다. 지금은 아무런 고민이나 문제없이 제사를 스스럼없이 지내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렇다면 윤지충이나 권상연과 같이 제사를 드리지 않다가 목 베임 당해 전주 풍남문에 9일간이나 매달려야 했던 사실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진리는 영원히 변치 않고 세월이 흘러도 바뀌지 않는다. 십계명 두 번째 계명을 어떻게 가르칠 것인가? “순교자는 통곡한다.”

 

김기복 목사 / 인천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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