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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동없는 기독교


교황 프란치스코1세는 범상치 않은 인물임에 틀림이 없다. 그는 이전의 교황들과는 분명 다른 행보를 거듭하면서 세계인들의 감동이 되고 있다. 그의 말 한 마디, 행동 하나 하나가 조명을 받으면서 그는 가톨릭교회의 가장 유능한 전도자가 됐다.


그에 대한 좋은 이미지들은 가톨릭교회의 이미지로 나타나면서 전 세계인들이 가톨릭을 선택하는데 결정적 동기를 부여하고 있다. 그는 그가 지금까지 보여준 대로 청빈한 자의 삶을 기쁘게 살아가고 있는 듯하다.


젊은 시절 감염으로 폐 하나를 제거한 채 50년을 살면서 한 호스피스 병동에서 에이즈 감염자의 발을 닦고 그 발에 입을 맞추는가 하면, 주교 관저를 거부하고 작은 아파트에서 살면서 버스를 타고 다니는 것을 좋아했다고 한다.


그런 그가 교황으로 선출 된 이후 교황 명을 12세기 가난한 자들의 성자로 불렸던 프란치스코를 택한 것은 그의 삶과 사상이 고스란히 녹아 빗어낸 결과였다. 실제로 그는 교황이 된 후 가난한 이들을 위해주는 가난한 교회를 사랑한다라는 말을 하면서 그의 가치관을 가톨릭 가치관으로 승화시켰고 전 세계는 그런 그를 뜨겁게 환영하며 사랑하기 시작했다.


최근에는 그의 이름다운 모습들이 또 공개되면서 그와 가톨릭교회는 성장의 대로에서 그 속도를 더 높여 달리게 됐다. 얼마 전 서임된 우리나라의 새로운 추기경 염수정 신부를 포옹하면서 드러난 교황의 손목시계와 그의 구두까지 화제가 되었는데, 50달러짜리 손목시계와 아무런 장식도 없이 40년간 한 번도 디자인이 바뀌지 않은 검은 구두는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기에 충분했다.


기존의 각종 권위를 스스로 허물면서 사람들 속으로 들어온 교황은 모두에게 박수를 받으며 감동의 파도를 거세게 일으키고 있다. 조금은 과하지만 전 세계인의 가슴속으로 쓰나미처럼 감동의 물결이 거세게 밀려들어가고 있는 것이다. 결국 이런 교황의 모습은 전 세계적으로 가톨릭교회의 성장으로 이어지고 있다.


지난 9년 동안 전 세계 가톨릭 인구가 11.54% 증가하여 2008년 현재 120658천명이 늘어나면서 1165714천 만 명으로 세계 인구의 17.4%가 되었다. 이런 성장 추세는 한국도 예외가 아니었다. 20095,120,092명으로 처음으로 인구대비 10%대를 넘어섰다.


지난 10년간 2~3%의 꾸준한 증가추세를 보이면서 세계 227개 국가에서 48번째, 그리고 아시아에서는 5번째로 수직 성장했다. 여기에는 박종삼이 교회생각에서 90년대 이후 개신교 신자 400만이 가톨릭교회로 이동하였다고 밝힌 대로 한국교회가 가톨릭교회의 성장에 크게 기여한 공로도(?) 포함 되었다.


사람들은 진리를 찾는 것이 아니다. 그저 자기들이 추구하는 어떤 목적과 마음의 안정, 그리고 감동이라는 매력에 이끌려 바람 부는 대로 삶을 맡길 뿐이다. 가톨릭이 성경적 기독교라기보다는 종교적 기독교에 가까운 것에 대하여 관심도 흥미도 없다. 자기들과 동질감을 형성하거나 자기들의 대리만족을 제공하는 것에 대하여 흥분하며 감동할 뿐이다.


스스로 사회적 약자라 여기면서 교황이라는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사람이 자기들처럼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에게 다가와 손을 내밀고, 그 스스로 가난한 모습을 보여주는 것만으로도 사람들은 감동하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진리의 종교냐 보다는 자신들을 이해해 주고 자신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손을 내미는 종교를 원한 것이다.


이런 사람들의 마음을 현 프란치스코 교황은 아주 달콤하게 충족시키고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에게 열광하며 감동한다. 어찌되었든 진리와 상관없이 프란치스코 교황에게는 감동이 있다. 가톨릭에는 동의할 수 없지만 그의 진실 여부를 떠나 표면으로 나타나는 그의 삶의 흔적들은 진정한 진리를 가지고 있는 우리가 살아냈어야만 하는 삶들이었다.


하지만 최근의 한국 기독교는 감동이 없다. 여기저기서 터지는 한국기독교의 자폭적인 모습들은 감동은 고사하고 사회의 분노를 사고 있다. 그뿐이 아니다. 문제에 대한 대응이나 처리하는 방식들도 미숙하거나 유아적이고 그나마 해결은 요원하고 도리어 더 큰 분노로 되돌아오고 있다.


가장 심각한 문제는 스스로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사고와 굳어질 대로 굳어진 비틀어진 의식구조들이다. 회개함이 옳은데도 잘못이 없다고, 하나님의 뜻을 행하였다며 항변하는 태도로 일관한다. 최근에 일어난 일들만 해도 그렇다.


어느 누구하나 지적된 문제들에 대하여 정중하게 사과 내지, 사죄하고 회개하며 돌이키겠다고 한 사람이 있는가? 누구나 허물은 있다. 실수, 실언, 실패할 수 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은 잘못을 인정하고 회개하는 용기에 감동하고 칭찬한다. 그리고 마음을 내민다. 그런데 이것이 강단에서 외치면서도 교묘한 말장난으로 얼버무리며 적당히 넘어가려 한다.


한 때 한국과 세계의 제일 큰 교회 담임이었던 분의 스캔들 소문과 법정 출두와 판결 등에 대하여 스스로 무죄를 주장한 것에 대한 질실 여부를 떠나 각종 설들의 중심에 선 것만으로도 많은 부정적 영향을 미쳤는데, 그것만으로도 한국기독교와 사회에 대하여 사과해야 할 이유가 된다.


사랑의 교회의 건축과 담임목사의 윤리문제들에 대하여 갈등하는 모습 또한 서로를 비난하며 자기변명에만 몰두할 뿐 그것으로 인하여 복음의 장벽이 만들어지고 있는 것에 대하여서는 일말의 양심도 책임도 없어 보인다. 그 외의 다수의 교회들이 비슷한 불의들을 행하는데 대하여 우리 사회는 개탄하고 있다.


거기에다 북한에서 체포된 우리교단 선교사인 김정욱목사의 억류 중 기자회견은 그의 진심이 아님을 알면서도 한국 사회는 그와 함께 기독교를 비난한다. 물론 그렇다하여 그의 선교적 사명이나 그의 헌신까지 정죄될 수는 없다.


하지만 그의 뜻이나 도전은 혹 칭찬받을 수 있을지 모르지만 남북이 대치한 상황에서 좀 더 신중했어야 했고, 순교의 각오가 현실이 되었어야 했다는 것이다. 그의 기자회견이 그의 의지와는 상관이 없다고 믿지만 그의 기자회견 내용은 선교사로써 심히 실망스러움을 우리 사회에 안겨 주면서 비난을 받는 상황이 된 것은 사실이다.


그런데 그의 이러한 행동들이 단순히 그 하나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런 일이 있을 때마다 사람들은 한국기독교회를 향하여 돌을 던진다. 복음의 길들이 작은 골목길에서까지도 가로 막히고 있다. 이렇듯 한국 교회는 지금 감동이 없다. 감동을 줄 수 있는 진리를 가진 유일한 종교임에도 감동을 주지 못한다.


50달러짜리 플라스틱 시계가 손목에 있는 교황같이 감동을 주는 인물이 우리 한국교회에도 있었으면 좋겠다. 사랑의 빚 외에는 지지 말라고 했는데, 은행 빚으로 충만하여 물질의 최고의 정점에서 춤을 추는 한국교회는 목회자나 성도 모두 세상에 감동을 줄 수 없다.


세상은 교회가 스스로 가난해 지기를 원한다. 심령에서부터 눈에 보이는 모든 것에서 가난해지기를 원한다. 교회의 최대 지상과제는 땅 끝까지의 복음증거다. 이 거룩한 사명을 성취하기 위해서는 감동을 주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 초대교회도 성령 충만한 가운데 뜨거운 감동을 주는 교회였다. 부자를 위한 마케팅에서 부자들의 지갑을 여는 방법이 감동이라고 한다.


아직 그리스도를 모르는 사람들과 세상이 복음을 향하여 마음을 열게 하는 길도 감동이다. 감동을 주는 교회, 감동을 주는 목사와 성도로 세상에 다시 서야 한다. 그 시작은 교회가 다시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감으로 주님께 감동을 드리는 일이 될 것이다. 주님이 감동하는 교회, 목사, 성도가 된다면 세상도 틀림없이 감동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계인철 목사 / 광천중앙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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