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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의 고유함


프란치스코 교황은 참으로 훌륭하다. 그의 청빈한 삶은 예수를 닮은 듯한 모습으로 투영되면서 감동과 칭송이 연일 끊이지 않는다. 그런 교황이 금년 8월 한국을 방문한다. 한국 기독교의 입장에서는 교황의 방문은 거의 재앙에 가까운 뉴스다. 가톨릭은 반대하지만 교황 프란치스코의 행보 하나 하나가 너무나 큰 파급력을 갖고 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는 분명 이전의 교황과는 다르다. 가톨릭의 교리와 주장들의 이전 모습과는 다른, 탈권위적으로 방탄차가 아닌 무게차를 타고 대중 속으로 들어가고, 자신의 생일에 가장 소외받는 노숙자들을 초청하는 일들은 성경에서 우리가 자주 보아왔던 예수님의 모습과 매우 흡사하다. 도시풍과 력셔리함을 추구하는 이 시대에 그는 도리어 시골풍으로 검소함과 실용성으로 삶을 이루어 가고 있는 감동 메이커이다.


이런 그의 삶은 결국 높이 평가를 받아 올해의 인물로 지난해 선정된 것에 이어, 지난 320일 세계의 위대한 지도자 50인 가운데 1위로 선정됐다.(미국 포춘지) 염주교가 추기경이 되는 경사와 함께 한국 천주교는 교황의 방문이라는 또 하나의 축제를 준비하게 됐다.


비난만 할 수 없는 그들이 보여주는 삶들은 오늘 기독교가 두려워해야 할 일임과 동시에 도전받아야 하고 거울을 삼아야 하는 일이 됐다. 비록 그들이 성경적 기독교라기보다는 종교적 기독교라 할지라도 지금 기독교는 최소한 프란치스코의 청빈한 삶을 배워야 한다. 불행하고 안타까운 일이지만 지금의 한국 기독교는 종교적 기독교의 기능마저도 제대로 감당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기 때문이다.


얼마 전 한경직 목사님의 14주기 추모예배가 있었다. 그분의 삶의 모습도 청빈이었다. 그는 한국교회뿐만 아니라 한국 사회에서의 존경을 받았다. 그러나 지금의 한국 교회에는 이런 분이 있는지 찾기가 그리 쉽지만은 않다.


물론 필자는 이름도 빛도 없이 주님의 삶을 보여주는 많은 교회와 목회자 그리고 성도가 있다고 믿는다. 그래서 아직 희망을 버리지 않는 것이고 이렇게 쓴 소리를 해 대는 것이기도 하다. 그리고 간절히 소망하며 기도한다. 이런 희망이 실재가 되기를, 단순히 희망으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희망이 열매로 거듭나기를 간절히 바라고 또 바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들려오는 소식마다 좌절케 하고 절망케 한다. 그래서 안타깝고 속이 상하며 답답하다. 언제까지 이렇게 가야하나 하는 생각에서다. 이미 다녀온 이들은 알겠지만 소위 성지(聖地)라는 곳에 진정한 성지(聖地)가 있었던가?


그 땅의 사람들은 잃어버린 복음과 신앙, 성지 아닌 성지에서 그 곳을 찾는 순례자들을 통해 생계를 이어가겠지만 그 곳에서 듣고 싶었고 보고 싶었던 주님을 향한 신앙의 현재들은 하나도 없었다. 말로 다 형용할 수 없는 고난과 박해를 받고 심지어 순교를 하면서까지 지켜 내었던 주님을 향한 신앙들의 모습은 흘러가고 사라진 시간처럼 모두 다 흔적 없이 사라졌다.


이 땅의 미래는 어떠한가? 두렵다. 이 땅에서 복음과 교회들, 그리고 성도들이 언젠가는 그 땅처럼 흔적 없이 사라지는 것은 아닐까 하는 마음에서다. 안타까운 것은 긍정보다는 부정적 미래가 더 확실해지는 듯 한 오늘의 우리 모습이다. 그래서 필자는 한국 기독교의 회복을 간절히 갈망한다. 성경으로의 복귀를 간절히 기도한다.


다른 종교 이야기 하나 더 해야겠다. 얼마 전 92살의 노승이 지팡이를 짚고 동국대학교 본관을 찾았다고 한다. 허름한 복장을 하고 맨발에 운동화 차림이었다. 그날은 마치 대학 기숙사 착공식이 있는 날이었다. 노승은 기숙사가 지어질 현장을 둘러본 후 학생들이 잘 배워야 나라도 불교도 잘 된다고 말한 다음 품속에서 1억짜리 수표 세 장을 꺼내 총장에게 건넸다.


더 감동을 주는 것은 이 엄청난 큰일을 한 노승은 기부 약정서나 사진 촬영, 사찰까지의 모시겠다는 학교 측의 친절을 모두 거절했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이름도 연락처도 남기지 않고 홀로 자기의 절로 지팡이를 의지한 채 돌아갔다고 한다.


기독교 안에도 이런 분들은 많이 있을 것이다. 주님을 살아내는 신실한 목회자와 성도들이 있음이 틀림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 기독교는 계속하여 야구의 병살타 행진이다. 작고 큰 불행한, 불편한 뉴스들이 각종 언론에 연일 오르내린다.


타종교와 종교인의 선행들이 부럽지는 않다. 다만 우리 기독교의 고유함들을 어떤 면에서는 그들이 행하고 있다는 것에 대하여 속상하고 화가 나는 것이다. 기독교가 세상의 풍속을 따라 세상의 가치관을 쫓아서는 안 된다. 세상의 경영과 복음의 경영은 분명 다르다.


그럼에도 세상의 가치와 풍속들이 교회 안에 들어와 그것이 마치 진리인양 소리치고 있다. 사실이 진실이 아니듯이 눈에 보이는 세상의 것들로의 부요를 기독교와 신자들이 성취해야 하는 것들은 결코 아니다. 도리어 그것들을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 기독교의 고유한 특성들로 변화시키고 새롭게 해야 한다.


아침에 눈을 뜨면 해는 동에서 떠오른다. 그리고 서로 진다. 이것은 분명 사실이지만 진실은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니다. 해가 움직이기 보다는 지구가 돌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제 세상의 것들로 덕지덕지 더럽혀진 우리의 모습을 털어내고 기독교의 참된 진실, 그 고유함으로 돌아가야 한다. 되찾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 지금의 것을 잃음은 어쩔 수 없는 아픔이지만 십자가가 있었기에 부활이 있었지 않았는가? 쉽지는 않지만 이제라도 기독교의 고유함들을 회복해야 한다.


맛 잃은 소금은 기독교의 고유함을 잃은 것의 상징이다. 다시 소금이 짠맛을 내기 위해 바닷물에 빠져야 하듯이 다시 그리스도의 복음에, 말씀에, 십자가에 빠져야 한다. 그러면 부활의 아침이 온다. 기독교의 고유함을 드러낸다.


계인철 목사

광천중앙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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