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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거리만큼 갈 때 십자가의 길이다


살면서 낯설고 회한이 밀려올 때가 변화되지 않는 내면과 마주 할 때이다. 인생의 연륜이 묻어나는 숙성된 향기보다 초보를 버리지 못한 모습을 볼 때이다. 경주를 하면 할수록 더 많은 책임을 감당하고 그것을 기뻐해야 하는데 그 반대일 때 더욱 그렇다.


쉽고 편한 가벼운 길을 좋아하며, 안일하게 살고 싶은 어린 모습은 당황스럽게 한다. 이해관계에 따라 적당히 타협하며 대우받고 인정받는 것에 예민하다가, 살며시 관심 있는 모습을 볼 때 놀란다. 심는 대로 거두는 하늘의 추수법칙을 믿으면서, 속성이나 꼼수로 해결하고 싶은 게으른 착각도 여전하다. 힘들고 어려운 짐을 벗고 가벼운 것으로 바꾸면서도 사명을 이룰 수 있다는 생각이 말을 걸어온다.


신앙생활의 나이테가 쌓여갈수록 십자가를 지고 십자가의 길로 푯대를 향해 달려간다는 고백이 자연스런 현상일 것이다. 편리하도록 줄이고 바꾸어 쉽게 걷기보다, 정해진 것을 메고 정해진 거리만큼 가는 것이 몸에 익숙할 때도 된 것 같은데 아쉽다. 사명의 십자가를 지고 왔으면 적응되고 익숙해져서 세상이 오히려 낯설어야 하는데 말이다.


사명의 무게만큼 지고가야 하는 것이 십자가이고, 그 거리만큼 걸어가야 하는 길이 십자가의 길이다. 개인감정과 사정에 따라 무게를 줄이고, 거리를 형편에 따라 축소하면 다른 길이 된다. 자꾸 가벼운 짐을 메고 가까운 길로 가고 싶은 유혹의 파도가 반복된다.


십자가를 지고 가는 길이 멀다고 거리를 줄이면 길이 달라진다. 예수님이 빌라도에게 재판을 받던 곳에서 골고다까지 메고 간 무게가 십자가이고, 그 거리만큼 걸었던 길이 십자가의 길이다. 가볍게 만들고 줄이고 바꾸면 막대기가 되고, 다른 길로 가면 아랍 상인의 후미진 뒷골목에 이를 뿐이다.


가벼운 것으로 하나 골라잡아 자기 편한 데로 지고 가는 퍼포먼스가 아니다. 사랑의 절정으로, 사랑하기에 무겁고 힘든 짐을 기쁨으로 지는 역설의 극치이다. 그 무게에 맞는 십자가와 그 거리에 맞는 길을 걸어가는 것이 십자가의 길이다. 예수님을 매어 단 틀이며, 우리를 매달 수 있는 크기와 무게로 만든 것이다. 매달 수 있는 것보다 더 크게 만들지도 않았고, 매달 수 없게 더 작게 만들지도 않았다. 가장 적절하게 만들어서 지운 영광의 틀이다.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고 걸었던 길이 비아 돌로로사(Via Dolorosa)이다. 라틴어로 비탄의 길’ ‘슬픔의 길이란 뜻이다. 비아 돌로로사는 로마총독 빌라도의 집무실에서 골고다 언덕까지 연결된 대략 1.5정도의 길이다. 비아 돌로로사는 채찍교회가 있는 곳에서 시작되어 무덤교회에서 끝난다.


채찍교회는 빌라도의 집무실이 있던 곳에 세워졌다. 예수님은 이 곳에서 채찍을 맞고 십자가를 진 뒤 골고다로 걸어갔다.


비아 돌로로사는 모두 14개의 스테이션으로 구분된다. 빌라도 법정, 선고교회, 채찍교회, 첫 번째 넘어진 곳, 마리아를 만난 곳, 구레네 시몬이 십자가를 지고 간 곳, 베로니카를 만난 곳, 두 번째 넘어진 곳, 예루살렘 여인들을 위로한 곳, 세 번째 넘어진 곳, 십자가에 못 박히기 위해 옷이 벗긴 곳, 형틀에 못 박힌 곳, 운명하신 곳, 아리마대 요셉이 시체를 내린 곳, 예수님 무덤 등이다.


비아 돌로로사는 현재 너비가 2m정도 폭의 길을 따라 좁은 아랍상인들의 가게가 줄지어 있다십자가의 길은 비아 돌로로사(Via Dolorosa)의 거리만큼 걸어가야 한다. 다른 길은 골고다에 이르지 못하고 이른다 해도 더 이상 십자가의 길이 아니다.


거리를 조정하면 십자가의 길이라고 말하여도 자신의 길이 된다. 십자가의 무게와 거리는 정해져 있는데 힘들다보니 잔꾀가 생겨 바꾸고 싶은 마음이 생긴다. 십자가를 지는 형식만 취하고 가벼운 것으로 바꾸어지고 가는 것에 의미를 두게 된다.


거리도 골고다까지만 가면 되는 것이기에, 그 거리를 힘들게 걷기보다 다양한 핑계로 축소시키려 한다. 그래서 무게와 거리를 줄이면서 더 좋은 효과를 내는 방법을 찾게 된다.


새로운 소식과 정보는 짐을 줄이고 그 거리를 바꾸면서도 성공했다는 노하우이다. 하지만 그것은 새로운 소식이나 지혜가 아님을 우리 속사람이 본능적으로 안다. 하지만 피하고 싶으니 솔깃하여 치우치고 잠시 귀 기울어 본 것일 것이다.


사람의 욕심은 바꿀 수 없는 것도 바꾸고, 거기에 의미를 부여하여 사면조치로 마음을 편하게 한다. 우리가 져야할 무게의 십자가가 무거워 보여도 몸에 맞는 무게이다.


가까운 지름길로 가려고 기웃거리며 거리를 계산하여 가면 오히려 길이 더 멀어진다. 무게는 지고 간만큼 가벼운 것이며, 거리는 걸어간 만큼 가까워진다. 반드시 그 무게와 그 거리를 채워야 하고, 그 과정이 바로 십자가의 길이다.


십자가의 길은 그 거리만큼 걸어가는 과정자체이다. 새로운 소식과 길은 없다. 빌라도 집무실에서 골고다 언덕까지 모든 고난의 과정을 거칠 때 골고다에 오르게 된다.


십자가에서 매달리며 고통의 과정을 다 마친 후에 부활과 영광의 면류관을 쓰게 된다. 그 고통의 무게와 거리의 과정을 눈물로 다 채워야하는 잔이다. 그 잔을 쉽게 바꾸고 싶은 소욕이 십자가를 막대기로 바꾸는 우상을 만든다. 편하고 쉽게 가고자 하는 치우침이다.


주변에 지름길을 알려주는 사람이 많고, 그 길을 알려고 찾아다니는 행렬에 끼고 싶을 때가 많다. 줄이고 축소시켜 포장해서 주면 소비의 욕망은 더 자극된다. 십자가의 길의 여정은 그 과정을 통해 이루고자 하는 섭리의 거리이다. 심리적이고 물리적 거리의 개념을 넘어선 영적 거리의 총합이다.


고난의 과정을 순종을 통해 새롭게 열어가는 부활의 대로이다. 개인이 십자가를 지고 걸어갈 길의 거리는 다를 수 있다. 하지만 그 거리와 무게만큼은 줄이거나 바꿀 수 없다.


바꾼다면 그것은 당장 쉽고 편할지 몰라도 십자기의 길은 아니다. 세상에 수많은 길이 있고 얼마든지 바꾸고 고쳐서 편하게 갈수 있는 방법들도 있다. 하지만 우리는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고 걸어가셨던 비아 돌로로사(Via Dolorosa)를 따라가야 한다.


그 과정의 거리만큼 뚜벅뚜벅 걸어가야 한다. 그 거리만큼 갈 때, 비로소 십자가의 길을 갔다고 고백할 수 있다. 그 고백이 우리 모두의 최후행동이길 소망한다.

 

추복현 목사 /광주요단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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