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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유적지 탐방 기고(1)

사도 바울 따라 산 넘고 바다 건너


모든 여행은 저마다 신성한 의미를 갖는다. 헤아려보면 들에 핀 들풀조차 의미덩어리일진데 삶의 한 조각을 떼어 잠시 낯선 거리에 세우는 일이야말로 얼마나 의미 있겠는가. 낯설음을 통해 신선한 혼란을 맛보고 다름을 통해 공존의 방식을 체득하는 일은 여행이 주는 큰 혜택이다.

더욱이 팔레스틴이라는 변두리에서 시작된 기독교를 세계화시키는 데 공헌한 바울일행의 발자취를 더듬어 보는 일은 성경을 경전으로 삼는 자들에게 흥분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래서 이번 행로를 단순한 여행에서 순례로 격을 올려도 무방하리라.

201441일을 불과 5분 남겨놓고 우리는 잠시 조국을 떠났다. 어둠이 자욱한 인천공항을 이륙한 철새는 묵직한 몸을 이끌고 하염없이 서쪽으로 날아갔다. 갈 길이 멀다는 사실에 주눅 든 여행객들은 담요를 목까지 끌어당겨 잠을 청하고 어떤 이들은 이어폰을 귀에 꼽고 의자에 붙은 모니터에서 액션영화를 골라보았다.

허리가 뒤틀려 화장실에 한두 번 다녀오고, 배달된 밥상을 두어 차례 비우는 동안 철새는 새로운 둥지를 찾아 쉼 없이 날개 짓을 하였다. 드디어 이스탄불이다. 땅에서 발을 뗀지 11시간 만이었다. 짐을 찾아 공항을 나서니 터키파 투어버스가 대기하고 있었다. 버스는 이스탄불의 새벽을 향해 들어갔다. 우리의 순례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이스탄불

새벽의 이스탄불은 민낯이었다. 간밤의 화려했던 불빛은 사그러들고 열정을 추억으로 만드느라 미처 화장하지 못한 여인 같았다. 비잔티움에서 시작해 콘스탄티노플을 거쳐 이스탄불로 내려오는 동안 수많은 이야기를 간직한 도시답게 히잡을 한 여인처럼 은밀할 것이라는 나의 예상은 보기 좋게 깨졌다.

우리를 안내한 현지 가이드인 알카는 히잡 대신 긴 생머리를 하고 잘룩한 허리에 꽉 조인 청바지를 입은 모던한 여성이었다. 가이드뿐만 아니라 히포드럼 광장에서 만난 터키의 젊은 여성들은 조국의 젊은이들과 다를 바가 없었다.

이천만이 넘는 많은 인구와 동, 서양의 길목에 자리 잡아서인지 엄격한 이슬람원리주의에 비해 충분히 세속적이었다. 우리 일행은 한식집에서 아침식사를 해결하고 술탄 아흐멧 광장으로 갔다. 히포드럼이라 불리는 이 광장은 고대 이스탄불의 중심부였다.

이 광장에는 길이 400m와 넓이 120m의 거대한 말굽모양의 경기장이 있었는데 각종 스포츠와 전차경기 그리고 집회장소로 사용되었다. 이 광장을 끼고 블루모스크와 아야소피아가 나란히 서있다. 아야소피아는 로마의 유스티아누스 황제가 세운 아름다운 성당이다.

히포드럼에서 행해지던 전차경기가 너무 과열돼서 폭동으로 돌변하자 화가 난 황제는 군대를 동원해 수십 만 명을 학살했다. 후에 시민들의 상처 난 마음을 위무하고 신께 사죄하는 마음으로 주후 537년에 지어 받친 게 아야소피아다. 아야소피아는 돔의 높이만 57m가 되는 거대한 건축물이다. 기둥은 내진설계가 되어 숱한 지진에도 오늘날까지 잘 견디고 있다.

아야소피아와 마주하고 있는 블루모스크는 술탄 아흐멧 1세에 의해 당시 모든 국력과 최고의 건축술을 동원해 1616년에 완성한 웅장하고 아름다운 건축물이다. 그러나 이 건축물에는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슬픔이 있다. 아야소피아 때문이다. 이미 자기보다 천 년 전에 세워진 아야소피아의 아름다움을 도저히 뛰어넘을 수 없다는 만년 둘째의 한숨 섞인 슬픔이다.

아야소피아는 천년에 걸쳐 교회당으로 사용됐다. 그러나 오스만제국이 들어선 후 500년간 회교사원으로 사용되다가 이제는 박물관이 됐다. 이것을 보면 건물이란 것은 그 자체의 유용성과는 별개로 얼마든지 카멜레온처럼 변모한다. 시간차를 두고 같은 장소에서 성경과 코란을 수용하는 데 전혀 어색함이 없다. 이는 비단 아야소피아만의 일이 아니다.

오늘날 유럽의 숱한 교회당이 술집이나 카페로 변하고 있고 말씀이 선포되던 강단자리가 상석으로 인기가 좋다고 한다. 조국교회도 이미 교회와 교회당과의 관계에서 길을 잃어버렸다. 사람을 믿음으로 세우기보다 건물을 세우느라 재정과 세월을 허비하고 있음에 서글픔이 밀려왔다.

아야소피아가 내게 서글픔만 준 게 아니다. 서글픔을 상쇄하고도 남을 선물도 줫다. 이번 성지순례의 처음과 마지막은 이스탄불이다. 우리는 이스탄불에서 갑바도기아를 거쳐 소아시아 일곱 교회와 드로아를 지나 그리스를 종단한 후 다시 이스탄불로 돌아왔다.

아야소피아로부터 선물을 받은 날은 순례 마지막 날이었다. 가이드의 설명이 끝난 후 자유로이 성당 내부를 둘러보다가 우연히 한 구석에 커다란 흰색 돌덩어리를 보았다. 호기심이 발동하여 그쪽으로 발걸음으로 옮겼는데 와우, 흰 대리석을 통째로 파내서 만든 침례탕이었다.

이런 발견은 여행 내내 계속됐다. 에베소에 있는 마리아기념교회와 사도요한기념교회 그리고 히에라볼리의 빌립순교기념교회와 빌립보의 바울기념교회에도 침례탕이 있었다. 이들 교회당은 대략 주후 6세기경에 세워진 것으로 적어도 그 당시까지 침례가 행해졌음을 증명하고 있었다. 침례교 목사에게 큰 선물이 아닐 수 없다.

이스탄불은 지나온 세월만큼의 아름다움이 켜켜이 쌓여있다. 코라교회의 아름다운 모자이크벽화, 그랜드 바자르의 다양한 상품들 그리고 토카프궁전에서 바라보던 보스포러스해협의 뛰어난 풍광과 지하물궁전 예레바탄의 신비로움은 순례자의 눈을 더욱 빛나게 했였다.

마지막 날 골든혼 선착장에서 배를 타고 동, 서 대륙을 가로지르는 아타튜르크 브리지까지 둘러보는 뱃길은 이스탄불의 숨겨진 속살이었다. 돌마바흐체궁전과 참르자 언덕 그리고 물 위에 섬처럼 떠있는 공주의 탑 크즈 쿨레시는 순례자의 지친 몸을 새롭게 해줫었다.

그러나 우리의 본격적인 순례는 갑바도기아부터였다. 첫날 정신없이 돌아다니다 지친 몸을 이끌고 아타투르크공항에 가서 오후 850분 카이세리행 국내선 비행기에 오르자 기다렸다는 듯이 천근의 무게로 눈꺼풀을 찍어 누르며 잠이 쏟아졌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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