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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리가 너희를 자유게 하리라(下)


그러나 18589월 일리노이 주 찰스턴에서 한 연설은 노예 해방에 대해 완전히 다른 견해를 담고 있다.


나는 어떤 방법으로든 백인과 흑인이 정치·사회적으로 평등하게 되는 것을 찬성하지 않으며, 찬성했던 적도 없다. 흑인에게 선거권이나 배심원의 권한을 주는 것, 그들이 공식적인 지위를 갖는 것, 또한 백인과 결혼하는 것에 찬성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우리와 함께 머무르고 있는 한 그들이 우리처럼 살 수 없으므로 상층과 하층 계급은 반드시 존재하게 됩니다. 다른 사람들과 마찬 가지로 나도 상층의 지위는 백인들에게 활당되어야 한다는 데 찬성하고 있습니다


링컨의 생각은 단순했다. 단일 연방의 유지야말로 미국 정부가 지켜야 할 궁극적인 목표이며, 노예제 폐지는 정치적 이해에 따라 찬성 할 수도, 반대할 수도 있다는 뜻이다. 결국 그는 노예제도에 관한 소신을 갖고 있지 않았다. 그가 대통령으로 취임한 지 한 달밖에 되지 않은 1861412일 섬터 요새에 대한 남부의 공격으로 남북전쟁이 시작되었다.


전쟁이 시작되었어도 노예 문제에 대한 링컨의 태도는 여전히 모호했다. 전쟁이 시작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장군들이 점령 지역에서 노예제를 즉각 폐지하자고 건의했을 때조차 그는 반대했다. 그렇지만 전투는 북군의 의도대로 돌아가지 않았고 북군은 남군에게 연전연패 하고 있었다. 결국 전투에서 패할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이 들자 링컨은 18627월 노예 해방령을 선포하게 된다.


남부에게 유리하던 전쟁은 1863년 게티스버그 전투에서 북군이 승리한 이후 전세가 역전되기 시작했다. 결국 18654월 남부연합의 수도인 리치먼드가 함락됨으로써 전쟁은 끝난다. 놀라운 것은 남북전쟁이 거의 끝날 무렵 많은 남부인들이 남부의 독립을 얻기 위해 노예제도의 철폐를 주장했다는 사실이다. 전쟁 종료 한 달 전 제퍼슨 데이비스는 한 외교관을 시켜 영국과 프랑스에


두 나라가 남부의 독립을 공식적으로 인정해 준다면 남부연합이 자발적으로 노예를 해방시키겠다라고 제안했다. 당시의 남부의 한 신문 사설도 이를 증명해 준다.


남부의 독립을 쟁취하는 데 노예제도가 방해물이 되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자유와 독립을 성취하는 데 노예제도가 극복할 수 없는 방해물이 된다면 노예제도를 당장 폐지해 버리자


그러나 이런 발언들이 너무 때가 늦은 것이었다. 과정이야 어쨌든 흑인 노예들은 링컨의 의해 해방되었다. 비록 전세를 호전시키기 위해 노예 해방을 전격적으로 선언했지만 그에 의해 노예가 해방된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학자들의 엄밀한 검증에 의할 경우 그는 결코 노예 해방 지지자는 아니다. 그러나 그에 의해 노예 해방이 결정적으로 이루어진 것이라 포장하는 데 많은 사람들이 주저하지 않는다.


극도의 첨예한 문제를 정묘하게 빠져나간 링컨은 가장 현명하게 거짓말을 한 사람이기도 했지만 결과적으로는 미국 대통령 사상 가장 정직한 사람이요 대통령이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겸손하고 정직히 행하는 자에게 축복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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