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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력서


계절은 소리 없이 옷을 갈아입고 있다. 서두르거나 더디지 않는 그들만의 리듬으로 변화의 옷을 바꿔 입을 줄 안다. 인생의 날도 흐르는데 그 계절에 맞게 옷을 입는 것이 낯설다. 옛것을 벗고 새 옷으로 갈아입는데 익숙지 않아서이다.


계절에 맞게 옷을 입어 길들어지면, 날씨가 바뀌어도 체감온도를 따라가지 못한다. 그래서 시절을 따라 변화하는 옷을 갈아입는 처세가 어려운지도 모른다. 인생은 그 사람이 살면서 입고 다닌 옷의 역사, ‘의력서이다. 어떤 옷을 입고 어느 자리에서 어떤 역할을 한 것인지, 그 사람이 입고 다녔던 옷에 그대로 나타나 있다. 이력서가 사람이 살면서 신고 다닌 미투리, 신발의 역사이듯 말이다.


철이 든다는 것은 인생의 계절을 알아가는 것이라고 한다. 때의 따라 입어야 할 옷을 준비하는 것이 명철이다. 그 시기에 맞는 옷으로 코디할 줄 아는 것이 지혜이다. 시대를 분별해 때에 맞는 옷을 입고, 변화에 맞는 역할을 감당하는 것이 삶이 아닌가 한다.


변하는 시간은 그에 맞는 옷 입기를 요구한다. 세월의 흐름은 결국 복장의 변화로 이어지게 된다. 그 옷은 그의 신분이며 배역이기 때문이다. 요셉은 채색 옷에서 노예 옷으로, 또 죄수복에서 세마포로 인생계절의 옷을 갈아입었다. 그는 어두운 계절을 담을 넘는 무성한 가지로 살았다. 틀림없이 계절을 따라 옷을 바꿔 입을 줄 알았던 것이 맞다.


어떤 옷을 입었던 그 옷에 맞는 형통한 시절을 살아 냈던 내공이 있었다. 때를 따라 흐르는 경륜을 보는 눈이 건재했기 때문이다. 강제적으로 옷을 벗기고 입혔지만, 언제나 그 옷을 자신의 옷으로 알고 그 옷에 맞는 삶을 살았던 모습이 존경스럽다. 살수록 옷을 갈아입는다는 것이 얼마나 어렵고 미련이 남으며, 그 옷에 맞는 삶을 산다는 것이 힘든 현실인지 알기 때문이다.


그래서 의력서를 보면 그가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어떤 사람인지 알게 된다. 사람들은 각자 입은 옷이 다르며, 입고 다녔던 옷이 달랐고, 앞으로도 입을 옷이 다를 것이다. 사람마다 나름대로의 의력서를 가지고 세상을 살아가면서 또 다른 의력서를 써가고 있다.


시절을 따라 옷을 갈아입을 줄 아는 나무도 그때가 가장 아름답다. 때마다 옷을 바꾸어 입기에 철따라 빛깔이 다르고 향기가 다르다. 인생의 계절도 그 때를 받아들이고 시기에 맞는 자리에 앉으면, 언제나 최고의 날을 사는 것이리라. 남의 잔과 상관없는 나의 잔이 넘치는 중이기 때문이다. 시절을 좇아 잎사귀가 마르지 않는 결실을 본다.


그때에만 볼 수 있고 그 과정에서만 맺히는 열매이기에 더욱 그렇다. 하지만 계절은 흘러갈 것이며 자리의 주인도 바뀔 것이다. 세월에 따라 옷을 입고 또 바꿔 입으며, 살다가 계절이 끝나면 거기서 옷을 벗어야 한다. 그것이 전부이고 그것이 마지막 옷, 수의면 된다. 다른 것도 없고 특별한 옷도 기대할 필요가 없다. 때를 따라 옷을 입을 줄 알고, 그 옷에 맞는 정체성을 알고 만족하며 산다면 그때를 가장 빛나게 살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의 삶을 방해하는 가장 큰 걸림돌은 정당한 대우를 받아야 한다는 생각과 권리에 대한 집착이다. 때를 받아들이는 변화보다 자신의 정당한 몫에 집착해 옷을 갈아입지 못할 때 그 옷은 변색된다. 변하는 날들은 때에 맞게 옷을 입고 살라는 날씨의 언어이다. 입은 옷에 맞는 그만한 대우만 주장해 계절을 무시하라는 것이 아니다.


옷에 따른 정당한 대우가 아니라, 날씨에 따라 옷을 입으라는 것이다. 그리고 옷에 맞는 은총을 누리면 된다. 그러기에 계절이 바뀌고 이에 합당한 옷 입기는 타이밍의 예술이며 영성이다. 시간의 섭리로 옷이 바뀌면 그 옷을 기쁘게 입고, 그 옷에 맞는 신분으로 살아야 한다. 미련도 이유도 없을 수는 없지만 그대로 받으면 된다. 옷의 주인공이 정해진 것도 아니고 주어져 걸친 기간에 충실했으면 그걸로 족하다. 그래서 적신으로 왔다가 적신으로 가도록 만든 것 이다.


처음부터 한 벌 한 벌 은총의 옷을 입히며 그 옷에 맞는 삶과 배역을 주셨다. 계절이 바뀌면 옷을 갈아입고, 그 입은 옷에 맞는 역할을 감당하며 살면 된다. 화려한 옷이거나 소박한 노동복이나 그 옷은 그의 인생이기 때문이다. 자기에게 주어진 옷을 입고 그 옷에 맞는 삶을 살아내야 한다. 사람들의 의력서는 출생부터 계속되고 있다.


지금까지 다양한 옷을 입고 수많은 날들을 걸어왔을 것이다. 무슨 옷을 입고 다녔던지 사람들은 그 옷을 보고 그 사람을 알아본다. 지금도 무슨 옷을 입고 있는지 모르면 그 옷과 상관없는 삶을 살고 있는 것이다. 에덴에서 가죽옷을 입혀주실 때부터 마지막 날 세마포를 입을 때 까지 인생은 옷을 입고 살아갈 수밖에 없다.


그 옷을 벗을 때까지 옷은 우리 정체성을 대변하고 그 역할을 요구한다. 그래서 요한은 약대털옷을 입었다. 그 옷을 입고 메시야의 길을 예비하는 광야의 소리로 살다 그 옷을 벗었다. 회당어귀에서 긴 옷을 입고 다녔던 바리새인과, 마지막 남은 속옷까지 제비뽑아 가져가도록 다 주고 떠난 주님은 옷으로 극명한 대조의 빛을 비추셨다.


계절은 바뀌건만 입은 옷을 벗지 않으려 하고, 옷을 더럽히는 이들로 기독교이미지가 훼손되고 있다. 이런 때 누구도 그 옷에 맞게 사명을 온전하게 감당하고 있다고 장담할 수 없다. 하지만 시간이라는 은혜를 통해 새로운 옷을 갈아입는 의력서를 써가는 것이 소망이다.


탕자의 누더기를 벗기고 제일 좋은 옷을 입힌 아버지의 사랑이 여전히 비추고 있다. 부정한 여인이 만진 옷자락으로 생명을 주시는 새로운 나라가 시작되었기에 새 노래는 계속 될 것이다


추복현 목사

광주요단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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