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기독교는 세계에서 가장 빠른 기간에 급성장했다. 인구가 더 많은 나라도 있지만, 인구수나 교회 규모로만 보면 한국교회는 가장 짧은 기간에 가장 빠르게 성장했다. 새벽예배도 다른 나라에는 없는 한국교회에만 있는 제도다. 한국교회의 성도들은 정말 열심히 기도한다. 헌금도 많이 한다. 성도들이 헌금하는 금액을 계산해보면 수입의 거의 25% 정도에 이른다고 한다. 이런 부분은 한국교회가 지켜가야 할 좋은 유산이다.
또한 사회지도층을 보면 판사와 검사의 상당수가 기독교인이고, 국회의원도 3/1 이상이 기독교인이다. 우리나라 인구의 19%가 기독교인인데, 국회의원의 3/1이 기독교인이라면 지식층일수록, 또 사회 수준이 높으면 높을수록, 경제 수준이 높으면 높을수록, 기독교인이 많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런 점에서 본다면 한국 종교는 기독교라고 말해도 될 정도다. 그러나 최근 기독교의 성장이 수적으로 후퇴하고 있다. 열심히 기도하고 있고, 전도도 열심히 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기독교인의 수가 줄어들고 있다. 이보다 더 심각한 것은 기독교가 사회적으로 조롱거리가 되고 있다.
어떤 개인이 흠도 있고, 잘못도 있고, 약점도 있지만, 그 사람이 많은 사람에게 존경을 받으면 함부로 욕을 못한다. 어떤 사람이 욕할 때 사회분위기가 그게 무슨 소리냐 이렇게 말하면 욕하는 사람이 이상한 취급을 받기 때문에 말을 함부로 못한다. 한때 한국의 기독교가 그랬다. 우리 기독교가 사회에서 압도적으로 존경을 받을 때가 있었다.
그때라고 해서 왜 기독교를 싫어하는 사람이 없었겠는가? 그런데 당시에는 사람들이 터놓고 기독교를 비판을 못했다. 기독교가 우리나라를 위해서 얼마나 큰일을 했는데 기독교인이 우리사회를 위해서 얼마나 중요한 일을 했는데 감히 기독교에 대해서 말을 못했다. 지금은 어떻게 됐는가? 지금은 기독교가 동네 개처럼 취급을 당하고 있다. 인터넷상에서 기독교를 “개독교”라고 조롱을 한다. 주인 없는 개가 동네를 돌아다니면 아무나 걷어차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지금은 사람들이 마음 놓고 기독교를 욕해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 최근의 상황을 보면 모든 분야에서 거의 유명한 사기꾼들은 기독교인이다. 부산저축은행 로비로 감옥에 들어간 사람이 있는데, 그 사람도 서울 모 교회의 집사이다. 벤츠여검사 사건과 관련된 문제를 일으킨 여자가 있는데, 외모도 잘생기고 국립대에서 수석으로 입학하고 수석으로 졸업할 정도로 똑똑했다.
그런데 거짓말과 불륜, 도둑질에 온갖 나쁜 짓은 다 했는데, 교회 기도회에 그렇게 열심히 참여했다고 한다. 이게 한국교회의 상황이다. 몇 년 전부터 한국기독교총연합회 사태, 영화 도가니, 밀양, 큰 교회 몇 목사들의 스캔들, 그리고 각종 교회 소송 때문에 판사들이 교회라면 아주 진절머리를 칠 정도의 상황이 됐다.
그렇다면 기도도 열심히 하고. 성경도 열심히 읽고, 전도도 열심히 하는데 왜 한국교회가 이렇게 되었을까? 한국교회의 실패를 한 마디로 말하면 윤리적 실패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흔히 복음의 수평적 혹은 수직적 관계에 대해 말하는데, 하나님과의 수직적 관계는 문제없는데, 사회 혹은 이웃과의 수평적 관계는 완전히 실패한 것이다. 윤리적 실패란 무엇인가?
성경대로 살지 않는다. 성경은 믿는데, 성경대로 행하지 않는다. 그래서 기독교를 계시 종교라 한다. 그런 점에서 기독교는 우리가 논리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이 세상의 그런 원칙을 가지고 설명이 안 된다. 하나님의 뜻과 사라의 생각이 비슷하다면 왜 계시가 필요하겠는가? 사라의 생각 가지고는 안 되기 때문에 계시를 허락하신 것이다. 따라서 기독교는 근본적으로 세상의 논리와 다른 것이다. 세상과 다를 수밖에 없고 달라야 한다. 윤리는 비경쟁적 영역이다.
우리는 경쟁과 관계없는 것, 특별히 다른 사람의 이익과 관련된 것에는 형편없다. 경쟁은 내 이익이 전제된 것이고, 비경쟁이라는 것은 다른 사람의 이익과 관련된 것이다. 즉 다른 사람을 배려하고 ,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것이다. 이제라도 나의 독선과 아집을 과감히 던져버리고 이웃의 빛을 비추고, 소금의 역할을 다해 교회의 부흥을 위해 희생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