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인철의 “그리스도인의 심장이 뛰는 사람” 이란 저서는 8인의 저명한 인사의 서평을 실은 책이다. 그러고 보면 나의 서평은 서평에 대한 또 다른 서평인 바, 즉 서평의 서평이라 할 수 있다. 사실 본인은 서평을 잘 안하는 사람인데 계인철 동역자 후배 제자의 글을 서평 하는 데에는 꼭 그래야만할 충동심이 생겼기 때문이다.
그 충동심이란 계인철의 저술의 내용이 아주 깊고, 그 표현이 풍성하고, 게다가 그 표현이 아름답고 절묘하기가 시 그 자체라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계인철은 유명인사의 저술을 그냥 건성으로 읽지 않고 아주 정독하고 정확하게 내용을 파악했다는 점이다. 남의 글을 내 글 읽고 소화하듯 하는 것은 여간한 성의와 노력 아니고는 불가능한 일이다.
그 표현이 깊고 아름다우며 절묘하다는 것도 그의 글을 읽노라면 독자로 하여금 꼼작 못하게 한 파트를 독파하게 만드는 글의 매력이 있다는 것이다. 한 장을 읽노라면 그 장을 끝내야만 직성이 풀린다. 그리고 독자로 하여금 많이 사색케 하는 여운을 남긴다. 이 글은 독자 자신을 글속에 던져놓고 “그럼 나는 뭐야?” 하도록 만들어 주고 있다. 계인철의 글은 독자를 다시 용광로의 주형(鑄型)에다가 끌어놓고 새로 인격모델을 만드는 것 같다.
왜 그의 책을 필독하면 좋은가? 이상에서 그의 책의 특징을 말했지만 그것이 오늘날 우리 독자에게 무엇을 어떻게 하라고 아름답게 교훈하고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 교회 그리스도인들이 목사들의 인스턴트식 음식설교에 맛을 들였기 때문에 도저히 딱딱한 음식을 먹기엔 거북함을 느끼는 차제에, 그의 책을 읽노라면 어쩐지 독자는 유식해지는 듯한 느낌을 갖게 될 것이다.
쉽기 만한 이야기를 이제는 좀 씹어 맛을 봐야 하겠다는 느낌을 가질 것이다. 고기는 씹는 맛에 먹지 않은가? 비프스테이크도 씹어야하지 그냥 넘어가는 것은 맛이 없다는 것.
사람들은 냇가에서 손쉽게 송사리 잡기에 익숙해 있지만 먼 깊은 바다에서 큰 고래사냥은 아예 포기하고 있는 이 세대 어부들에게 바다로 나오라고 권하는 것이 바로 이 책이다. 독서 좀 똑바로 하라고 외치는 것 같다.
그는 깡마른 농촌 목회자로 봉사하고있다. 농촌 할머니들 앞에서 시원하게 말 못하는 설교를 하느라고 애쓰는 그의 모습이 안타깝기만 하다. “그대, 서울로 오라”고 말만 했지 막상 서울로 올리지 못하는 나의 정치세력(?)의 한계점도 느껴본다. 또 막상 이를 어느 교회에 소개하기에는 과연 그의 사상과 지적표현에 순응할 교회가 몇이나 될까 걱정도 된다. 언필칭 사람들은 말할 것이다. “그런 목사라면 불행 하겠네요”라고. 그러나 불쌍한 것은 그 목사가 아니라 그를 못 받아들일 만큼 저하된 교회의 수준이 아닐까.
말하고 보니 서평인지 인물평인지 모호하게 되었지만 서평은 곧 인물평으로 직결된 것 아닌가?
폐일언하고 그의 “그리스도의 심장이 뛰는 사람”을 구독해 보라. 일독이 아니라 다독하고 속독이 아니라 정독해 보라. 고개를 끄덕이면서 ‘그려 그려’ 할 수 있는 목사와 교회가 많이 나타나길 바라면서 붓을 놓는다.
水流(수류) 권혁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