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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식일의 논쟁을 끝내라 명백한 성경적 이단 안식일 교회의 정체(2)

율법과 복음의 관계 옛 법과 새 법의 관계
하나님 말씀과 사람의 교훈
하나님의 말씀을 인용하는 사탄의 전략
예수 그리스도를 따를 것인가? 엘렌 화이트를 따를 것인가?


(2) 복음의 의의와 목적
(율법의 선고로 사망에 이른 자들을 살리는 용서와 구원의 복음)
죄로 인하여 심판과 멸망에 이를 수밖에 없었던 인간을 하나님은 율법으로부터 자유케 하기위한 율법 외에 다른 한 법을 준비하셨다.(롬3:21) 마음과 양심이 죄로 인하여 망가진 사람은 약하고 천한 초등학문 수준인 율법조차도 지킬 수 없기에 속사람을 선한 양심을 치료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랑으로 살아갈 거듭난 자들의 삶의 방식인 믿음 즉 새사람 새 계명 영으로 사는 하늘 백성의 법을 부여 하셨는데 이것이 마음과 생각에 기록한 법인 복음이다.(히8:10) 이 새 계명이 적용되려면 믿음으로 옛사람이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가 사는 거듭남이 있어야 한다.(롬6:1~6. 골2:11~12,요3:3~6)


율법의 선고로 인한 공의의 요구된 사망은 예수그리스도와 합하여 죽어야 되는 죽음(히9:27)으로서 하나님 자신도 의로우시며 예수를 믿는 자도 의롭다 하려 하심이다.(롬3:25~26) 즉 하나님의 공의의 요구가 우리대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전가되어지고 우리는 그분의 의로 의로움을 덧입게 된 것이다.

 

폐하여진 법 그러나 영원한 법 율법
죽음은 율법의 법적 효력과 결과이지만 예수 안에 함께 죽고 살아난 자들에게는 율법이 적용되지 않는다. 이는 옛 남편의 법에서 벗어난 여인과 같다.(롬7:1~6)남편이 죽으면 남편의 법에서 벗어나는 것과 같다. 이 같은 믿음은 예수그리스도를 영접하므로 하나님으로서 나는 거듭남이요 율법에서 자유로워진 새로운 삶이다.(요1:12~13, 고후4:17)


믿음의 성도는 율법에서 벗어났다. 예수께서 율법의 공의의 요구를 충족시켰기 때문이다(롬10:4 ,갈3:13~15)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피의 영역 안에 거하는 자는 율법의 저주와 권세가 폐하여진 것이다.(히8:13, 10:1~9) 예수그리스도의 대속의 피가 자유케 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 밖에 있는 자들에게는 영원토록 죄와 사망의 율법의 권세가 유지 되므로 형벌과 지옥의 불과 고통이 지속되어진다.


구원받은  자들에게는 새로운 방식의 법이 요구된다.(골2:2~7,3:1~13) 예수로 사는 삶이다. 옛사람이 죽고 새사람으로 사는 법이 사랑의 새 계명으로 강권된다.(롬1:14)
이는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인데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다.(롬3:21~22)

 

이것이 복음이요 예수그리스도의 의이다. 율법으로는 의롭다함을 얻을 자가 없으므로 아들을 믿는 의를 통하여 구원을 얻게 하신다는 것이다.(롬3:21) 즉 율법으로가 아닌 복음의 법인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구원을 이루시겠다는 뜻이다.

 

율법과 복음은 상충되며 서로 충돌하는가? 아니다 하나님의 주도면밀하신 섭리와 거역 할 수 없는 사랑과 은혜의 관계를 나타내는 상호 보완의 관계를 가지고 있다. 율법은 하나님의 엄위롭고 지엄한 공의를 나타내고 누구에게도 공정하시다는 확고한 증거를 보여준다.

 

율법의 제정은 영원히 폐하여지지 않는다.(마5:17~18) 그렇다면 성경은 왜 율법은 변역되고 폐하여질 것이라 하였는가?(히7:12, 18, 8:13 10:9)
더 나은 법 사랑의 계명으로 발전하여 흡수 된 것이다.(마5:17~48)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하시고 미워하면 살인이며 음욕을 품기만 해도 간음한 것이라는 말씀은 율법을 폐하는 것이 아닌 강화시킨 것이다. 새 계명은 율법보다 열등한 것이 아이라 월등한 것이다.


율법을 행함으로 구원이나 상급을 받으려함은 어리석음이다, 서기관이나 바리새인들의 율법준수 행위는 감히 흉내조차도 따를 수 없다. 그럼에도 그것은 껍데기 외식 일뿐이기에 주께서 책망하셨다. 마음으로 중심으로 행하려면 더 더욱이나 불가능하다.

 

우리는 여기서 예수님의 말씀의 핵심을 발견해야 할 것이다.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 이로라”(마5:17, 눅24:35) 예수님은 더 나은 완성된 법인 사랑의 새 계명을 주시러 오셨다. 억지로 외식으로 이룰 수 없는 법을 강제로 준수케 함이 아니다. 사랑 때문에 아니 할 수 없는 법 즉 마음과 중심에서 우러나는 사랑의 법을 세워 율법의 완성을 도모하셨다. 마음과 생각에 기록하심. (히브리서8:10~13) 새 계명을 주시려 자신을 십자가의 대속물로 주시므로 예수의 사랑을 따르지 않을 수 없는넘치는 사랑의 새 계명을 부여하셨다.


그러나 이 예수 그리스도의 새 계명을 거절하고 따르지 않는 자들에게는 율법의 준엄한 심판이 폐하여지지 않고 세상 끝 날까지 없어지지 않고 다 이루어 질것이다.(마5:17~18) 히브리서 저자는 전엣 계명이 무익함으로 폐하고(히7:18) 제사직분이 변역한즉 율법도 반드시 변역하리니(히7:12)하였고 예수그리스도는 더 좋은 언약의 보증이 되셨다.(히7:22) 첫 언약이 무흠하였더라면 둘째 것을 요구할 일이 없었을 것이라 하였다.(히8:7)


율법의 한계에 대한 성경적 주장들을 살펴보자.
율법을 완성케 하고자 오신 예수님(마5:17~18), 이는 첫 언약 계명이 완전치 않음을 나타내는데 이는 율법의 제한적 한계를 드러내는 것이다. 율법이 완전하다는 말은 죄를 지적하고 인간이 죄인임을 증명하는 쓰임에는 완전하지만 그렇다고 인간을 완전케 만드는 구원에는 완전치 않다는 뜻이다. 이는 완전한 법을 가진 나라라고 해서 그 법아래 사는 국민이 완전해지지 않음과 같다.

 

예를 든다면 병원에서 진찰하고 병의 이름과 상태를 찾고 진료기록을 만드는 것은 치료의 전단계이나 치료를 하는 처치를 받는 것은 아닌 것과도 같다. 진찰은 율법으로 치료는 복음이신 예수 그리스도이심과 같다. 복음은 율법을 훼손함이 아니라 완성된 사랑의 법안에(롬13;8-10)율법을 흡수하는 것이다.

 

주인의 아들이 어렸을 때에는 청직이 몽학선생 아래 있었을지라도 장성하면 몽학선생 아래에 있지 않음과 같은데 몽학선생의 가르침이 없어져 사라진 것이 아니라 장성한 자의 속에 흡수되어 남아 있음과 같다.


이는 식물의 떡잎이 성장하면 없어지는 것 같으나 결국 그 식물의 바탕이었던 양분이 흡   수 됨 같다 하겠다. 또한 율법은 달과 같아서 밤에는 밝고 환하게 느껴지나 복음의 새 계명의 해가 돋으면 그 빛이 쇠락해져서 희미하게 보일 뿐이듯 복음이신 예수그리스도의 새 계명의 관계가 그러하다.

 

율법의 완성인 사랑의 계명
예수께서 제정하신 사랑의 새 계명은 율법의 완성을 주장하신 완벽한 것이다.(롬13:8~10,갈5:14) 마태복음 5장에 율법의 강화된 내용을 포함하고도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의보다도 더 나은 의를 이룰 수 있다.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그 속에 모든 계명이 다 들었기 때문이다.( 갈5:14)에 온 율법은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같이 하라 한 한 말씀에 이루었나니 너무나 많은 계명의 조항들을 다 외울 수도 지킬 수도 없었으나 율법을 제정하시고 수여하신 하나님의 본래의 뜻이 사랑이기 때문이다.


한 율법사가 예수께 질문하여 가장 큰 계명을 물었을 때 첫째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둘째는 네 이웃을 네 몸 같이 사랑하라고 하셨다.(마22:36~40)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대 강령이라 하셨다. 율법의 수많은 조항들은 고기 잡는 투망(던져서 고기를 잡는 어망)의 수많은 그물의 추와 그물의 코와 같다.

 

추와 그물코를 잡고서는 고기를 잡을 수 없으나 새 계명인 사랑의 법은 그물 끝에 있는 줄과 같아서 줄을 잡아당기면 전체의 그물이 원하는 자의 손에 들어와 고기를 잡을 수 있음과 같다 하겠다. 율법의 최고 단계가 사랑이나 율법을 행하여 하나님을 기쁘시게 못하는 것은 하나님의 선하신 사랑의 뜻을 율법을 통 하여는 인간은 알 수도 이룰 수도 없었기 때문이며 이는 육법전서를 모두 외운 후에 법을 지키려 하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율법을 준수하고자 애쓰는 것이 아닌 하나님의 요구하신 사랑을 실행함이 온 율법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삶인 것을 깨달아야 한다. 사랑을 실행하면 온 율법을 한꺼번에 이루어내는 최고의 계명을 실천함이 되기 때문이다(롬13:8~10, 갈5:14) 그러므로 율법의 준수 여부가 아닌 사랑과 믿음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를 원하셨다. 아브라함의 믿음과 같은 하나님의 선하심을 절대적으로 믿고 의심 없이 순종하고 하나님을 신뢰하고 사랑하는 바로 그것을 율법의 의 위에 (외에) 두셨다.(롬3:21~22, 4:1~3)

 

왜 율법으로가 아닌 믿음과 예수의 새 계명인가?
인간의 범죄와 타락의 시초가 하나님의 선하심과 의로우시고 사랑이심을 의심(불신)케 하고 불순종케 한 사탄의 꾀임에 빠져들어 동조하고 사탄의 뜻에 순종한 최초의 원인이었기 때문이다. 즉 믿음 없음이 불신앙과 불순종의 원인이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먹지 말라, 정녕 죽으리라!” 하셨는데 하나님을 사랑하고 믿고 신뢰하고 순종했다면 사탄이 ‘먹으라, 죽지 않는다, 눈이 밝아져 하나님 같이 된다!’ 했을 때 과연 따라 했을까? 그러므로 사단의 하수인으로 전락한 인간을 다시 회복시키고 하나님의 자녀와 사랑받는 백성을 부르시기 위하여 믿음으로는 아브라함을 순종으로는 예수 그리스도를 인류구원의 중심으로 삼으셨다.

 

그러므로 율법은 하나님이 사랑이심을 나타내고 드러내기 위한 공의의 속성을 공포하기 위한 죄와 사망의 법을 위하여 제정된 것이요 구원의 직접적인 도구가 아닌 간접적 필요 도구인 것이다. 즉 모든 이의 입을 막고(핑계못함) 예수그리스도께 나와 죄 사함을 입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사실을 엄중히 선포하는 도구인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의로움은 율법을 준수함으로 얻어지는 의로움이 아니라 믿음과 사랑으로 순종하는 아브라함의 믿음을 의로움으로 정하셨으며 예수그리스도의 믿음과 사랑의 순종함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의로움으로 인정하시고 받으시는 것이다.

 

구원받은 성도의 율법 준수의 여부
예수그리스도로 구원받은 성도가 율법을 지켜야 하느냐 지키지 않아도 되느냐의 문제는 아직도 논란의 대상이다. 구원받은 성도라도 복음의 자유함을 깊이 알기 전에는 상속자라도 몽학선생아래 있음같이 율법의 기본 상식과 지식을 갖추기 까지는 율법의 기본아래 있어야 마땅하다 하겠다. 복음의 자유가 남용되거나 오용될 소지가 많기 때문이며 어떠한 속박과 멍에와 무거운 짐 아래서 예수그리스도로 자유 함을 얻게 되었는지 알아야 하기 때문이다,


지금의 자유 민주주의의 체제 아래서도 인격과 기본 품성이 성숙되기 전의 미성년자에게는 자유의 권한을 일정부분 제한함과 같다. 자유와 권한의 존속과 유지를 위한 책임과 의무의 기본의 틀(율법의 기본적인 법)이 갖추어져야 마땅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그리스도를 영접한 성도는 하나님께로서 낳아졌기에 하나님의 자녀요 후사요 천국의 상속자다.(요1:12~13) 이들에게는 율법은 몽학 선생이요 종이며 일정기간 후에 내어 쫓아야 할 계집종과 그 아들이다. 이 법은 육체에 관한 땅의 법이요 영에 속한 하늘의 법이 아니다.(갈3:30)


이 일정기간은 얼마일까?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신 뜻을 예수의 심령으로 깨닫고 그 사랑을 실천하고 따르고자 할 때 즉 성령의 도우심을 자기 이익이 아닌 주를 위하여 구하기 시작 할 때 즈음이라 본다. 즉 신앙에 철이 들어 권리, 자유, 특권을 주장하기보다도 사랑 받음에 감사 할 줄 알 때다. 육신의 요구대로가 아닌 성령의 뜻에 따라 성령의 열매를 맺는 삶을 살 때다.


이것이 영으로 사는 성숙한 그리스도인의 삶이며 율법으로의 삶이 아닌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복음으로 사는 율법의 완성된 사랑의 삶이다. 이같이 성숙된 성도의 삶은 율법의 요구가 예수 안에서 끝난 것이며(롬10:4) 이 사람은 예수 안에서 율법은 폐하여지고 새 계명인 사랑의 법안에 사는 삶인 것이다.(롬7:6, 골2:12~15)

 

이와 같은 성령의 열매를 맺는 이들을 제지 할 세상의 법(율법)이 없다.(갈5:22~23)
이같이 자기의 뜻이 포기되고 주의 뜻이 덧입혀진 사람을 옛사람이 죽고 새사람으로 거듭난 자라고 한다.(롬6:1~6 골2:12~15)골로새서는 이를 그리스도의 할례라 했다. 그러므로 성숙하고 거듭난 성도에게 ‘율법을 따라 행하고 율법의 요구를 준행해야 한다’는 말은 대학생이며 성년이 된 어른을 유치원법과 초등학생 법 (약하고 천한 초등학문)으로 살아가라는 말이 된다.


바울사도는 갈라디아서에서 다시 할례와 율법의 조항들을 행하여 살라고 가르치거나 따르려는 자들을 책망하여 “너희가 어찌하여 약하고 천한 초등학문으로 돌아가서 저희에게 종노릇 하려느냐”고 질책했다.(갈4:9)


옛사람이 죽었기에 옛 법아래서 해방 되었고 자유하게 됐다.(롬7:1~6) 그러므로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길 것이요 의문의 묵은 것으로 아니함이라 했다.(롬7:6) 예수와 함께 부활한 새사람은 이전 것은(율법)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노라(고후5:17) 했다. 예수그리스도의 초청은 바로 이것이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짐은 가벼움이라”(마11:28~29) 하셨다.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무거운 율법의 짐을 내려놓고 예수의 사랑의 계명을 지고 따르는 것이다.
조의상 목사
은총교회 / 서울서지방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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