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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최근 예수의 비유 연구 동향”

(데이비드 B. 가울러)을 읽고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비유로 말씀하시고 비유가 아니면 아무것도 말씀하지 아니하셨으니”(13:34)라고 하실 정도로 예수의 말씀은 비유로 이어진다.

이는 예수님이 고전적인 이야기꾼임을 알려 준다. 고대의 많은 선생들은 스토리를 사용해서 그들의 가르침을 전했음은 물론이다.

어느 스승이 스토리 없이 그들의 가르침을 전한 적이 있었던가? 가르침을 용이하게 하기 위함이다. 그러나 예수님께 비유는 그렇지 않다.


예수님은 그의 비유가 하나님의 나라의 비밀이며, 누구든지 쉽게 알아듣고 그 비밀을 깨우칠 수 있는 게 아니라고 하셨다. 오히려 보기는 보아도, 듣기는 들어도 비유는 여전히 수수께끼처럼 남아있다.

예수님의 비유는 그냥 아무나 막 밀고 들어갈 수 있는 문이 아니라, 그 비유의 문법 또는 하나님 나라의 맥락을 파악한 자들이 맛볼 수 있다.

폴 리꾀르가 말한 바 에둘러서 천천히 돌아가는 해석의 사유가 아니고서는 예수님의 비유는 그들에게 다가가지 않는다.


비유의 비밀과 수수께끼는 누구에게나 자신을 개방하지 않는다.

예수님의 비유를 접근하는 고전적인 두 가지 방식, 알레고리(allegory, 諷諭)와 패러블(parable, 比喩)은 여전히 현재도 유효하다. 알레고리(풍유)는 문자 그대로 다른 뜻으로 말하는 것이고, 패러블(비유)옆에 두어서 비교하다를 뜻한다.

오리겐(185-254)의 알레고리는 아돌프 율리허(1857~1938)의 패러블에 의해서 폐기되었으나, 알레고리 해석이 최근에는 나름의 가치를 여전히 지니고 있다는 비유 연구 결과도 나타난다.


오리겐은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에 나오는 사마리아 사람을 예수님 자신으로 해석한다. 그리고 율리허는 단지 이웃의 가련한 처지를 불쌍히 여길 줄 아는 크리스천을 위한 도덕적인 교훈으로 해석한다. 율리허는 오리겐을 배타했으나, 오리겐은 여전히 유효하다.

선한 사마리아 사람은 예수님이기도, 동정많은 크리스천이기도 하다. 그렇게 해서 비유의 의미는 확장되어 많은 사람들을 비유의 세계로 초청한다

 

여기서 또하나 중요한 사실은 비유의 의미를 단 한가지로 단정할 것인가 하는 문제이다.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는 너희도 가서 이와같이 하라는 예수님의 말씀대로 죽음의 사경에서 헤매고 있는 불쌍한 우리 주변의 이웃을 돕는 도덕적인 실천을 의미한다.

그 외에 다른 의미는 부차적이고 중요하지 않다. 비유는 단 하나의 의미로 족하다.

그러나 실제로 비유는 단 하나의 의미 이상을 갖는다. 불쌍한 이웃을 돕는 도덕적 실천이라는 중심 의미가 있다 해도, 도망가는 제사장과 율법사, 이와 대비되는 경멸받아 마땅한 사마리아 사람의 등장, 절망에 처해 있는 강도만난 자에게 돌발적으로 나타난 사마리아 사람, 갑자기 나타나서 나그네를 파괴하는데 온 힘을 다 기울이는 강도 현실, 그에 비해서 도망치기에 온 힘을 다 기울이는 제사장과 율법사의 현실, 그리고 그로 인해서 깨어진 선과 악의 균형, 사마리아 사람의 강도만난 자를 향한 극단적인 래디컬리즘, 등등의 결코 부차적이지 않은 또다른 의미 중심들이 비유 안에서 끝없이 떠오른다

    

비유는 그 자체로서 수많은 물음을 스스로 드러내고 귀있는 자들은 비유의 물음을 듣고, 그가 처한 상황에서 비유의 물음에 답한다. 그리고 그 물음과 대답은 무척이나 다양하게 전개된다. 비유는 하나의 의미가 아니라 수많은 의미를 드러내면서 우리가 처한 구체적 현실을 사로 잡아 비유 경험을 통해서 자기 자신과 이 세계를 새롭게 바라보고 새로운 피조물로서 하나님 나라를 살게 한다.


예수님의 비유는 알레고리와 패러블을 넘어서서 또한 메타포(metaphor, 隱喩)이다. 메타포는 문자 그대로 다른 곳으로 데리고 가다는 뜻이다. 예수님의 비유는 우리가 비유를 듣고 읽을 때 그 비유는 우리를 그 비유를 넘어서서 또 다른 세계로 데리고 간다. 비유는 하나의 예화로 그치지 않고, 비유를 통해서 우리는 전혀 다른 세계를 경험하게 된다. 다른 세계 경험, 바로 그것이 비유의 목적이다.

예수님이 비유를 말씀하실 때, 비유를 듣는 자들은 비유의 세계 속으로 들어간다. 그래서 그들의 일상이 중지되고, 비유의 세계가 그들을 사로 잡아서 하나님 나라 경험을 각인한다. 그래서 그들은 비유의 세계 안에서 선한 사마리아 사람을 직접 대면해서 그의 말과 행동을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온몸으로 경험해서, 그들은 이제 비유를 경험한 이전의 옛사람으로 결코 돌아가지 못한다. 그래서 그들은 비유의 사마리아 사람을 경험하고, 이를 통해서 하나님 나라를 새롭게 경험하고, 이제 그들은 이 세계 안에서 오히려 비유의 세계를 산다.

김병제 목사 / 총회 기획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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