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짜장면 한 그릇 돈 내고 먹어야 맛있다

미야자키 마사히로가 쓴유대인 상술 화교 상술에서 유대인들의 성공 배경을 설명하기를 지연혈연주의인 화교와는 달리 합리주의라고 설명한다. 우리나라는 다른 나라와는 좀 유별나게 좌우익, 진보수의 나눔이 지나칠 정도로 선명하다.

이는 과거 당쟁으로 얼룩졌던 조선의 역사에서 그 DNA가 흘러들어서일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최근에서 와서는 내면에서 흘러나오는 과거의 흔적보다는 내면으로 채워 넣는 것에 의한 경우가 일반적이다. 그렇다면 무엇으로 내면을 채우는가? 즉 사상을 형성하는가? 많은 것이 있겠지만, 그 중 하나는 언론이 아닐까 싶다.


언론 중에도 종이신문의 영향은 매우 크다 할 수 있다. 앞서 언급한 책에서 유대인들의 합리적인 사고 형성은 다름 아닌 신문을 통해서라고 한다. 그들은 어떤 한 사건에 대하여 그날 발행한 모든 신문을 동시에 펼쳐놓고 서로 비교해가며 그 사건의 객관을 찾아 사건의 진실을 정확하게 파악하여 그것에 합당한 생각과 행동을 한다. 한 신문만을 고집스럽게 읽고 그 신문의 견해를 따르는 것이 아니라 모든 신문들을 통해 한 사건에 대한 객관적, 합리적 사고를 형성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합리적 사고로 모든 사물, 사건, 사람을 보면서 대응하고, 판단하면서 세계를 정복한 것이다. 우리는 어떤가? 합리적인가? 비합리적인가?


자존심 상하지만 다분히 비합리적이다. 보수적 신문을 읽는 사람은 보수적 사고로, 반대로 진보적 신문만 읽는 사람은 매사에 진보적 사고로 충만하다. 그래서 서로 타협이나 융합, 하나 됨은 대부분의 집단에서 거절된다. 오직 자기들의 주장만 옳다고 소리쳐 외친다. 이러한 사회 현상은 서로 대립하고 갈등하며 사회 한 축의 불편을 형성한다. 오늘 우리 사회의 문제들은 매우 다양하지만 그 중 심각한 문제는 지나치리 만큼 주관적, 집단 이기적, 편향적 사고라고 할 수 있는데, 한 번 보고 사라지는 TV 영상보다는 정독이 가능한 종이신문의 영향이 상당부분 차지한다고 볼 수 있다.


이처럼 신문의 영향, 신문의 가치는 상상을 초월한다. 영상 매체가 하루가 다르게 발전하면서 종이문화가 곧 종말을 고할 것으로 대부분 인식했다. 곧 인터넷 서적으로 인해 종이책이 사라질 것이고, TV로 인해 신문도 사라질 수 있다는 예상들을 했지만 사람들은 어느 것이 더 진정한 유익을 주며 필요한지를 알고 있었다. TV 프로그램에서 실시한뉴스 기억도실험 결과, 종이 신문이 컴퓨터와 스마트폰을 제치고 1위를 차지했다는 시험결과는 아무리 TV 등 영상매체와 인터넷이 발전한다 하여도 사람들은 여전히 종이책을 찾고 있으며, 신문을 매일 아침 구독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는 기독교적 입장에서는 부정적이지만 고전으로 돌아가려는 르네상스와 같다. 물론 인터넷 신문의 등장이 종이 신문을 위협하고 있지만 아직까지는 젊은 세대가 주로 뉴스를 접하는 방식에 머물고 있다. 그들이 다음 세대이기에 결국에는 인터넷 신문이 종이 신문의 종말을 고하게 할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열어두어야지만 반드시 그렇게 되는 것은 아니다. 어느 시대든 제도와 문화에 저항이 있어왔고, 복고하고자 하는 마음들이 항상 한 축을 형성해 왔기 때문이다.


그래서 앞으로도 종이책, 종이신문은 과거의 영화만큼은 아닐지라도 그 명맥만큼은 지속될 것이다. 이는 신문의 가치 증명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문의 위기임에는 틀림없다. 그러기에 신문은 스스로 살아남는 방법을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고민하고 찾아야 한다. 갈수록 편리해지는 시대에 더 편리해질 디지털문화로부터 생존을 넘어 다시 옛 영화를 찾기 위해서는 뼈를 깎는 고통을 감내하며 독자의 마음을 되찾아 올수 있는 신문의 매력을 보여주어야 한다.

이런 범주에서 침례신문도 마찬가지다. 일반 일간지와 달리 교계지는 좁은 독자층을 상대한다.


그 중에 교단지는 더 좁은 독자를 상대한다. 그러기에 위기는 더 크다 할 수 있다. 이런 문제들을 생각할 때 침례신문은 지금보다 더 뼈를 깎는 고통과 고난의 길을 걸어야 할 것이다. 교단 정론지로 그 기능을 충분히 감당하며 교단 내 모든 독자들을 충족시킬 수 있는 다양한 편집기능과 힘을 발휘하여야 한다.

보다 적극적으로 교단의 문제와 대안을 통찰력있게 기사화하여야 한다. 독자가 원하는 것이 진정 무엇인가를 펜의 감각으로 감지하여 주관을 객관화하고, 객관을 주관화하는 기능을 유감없이 발휘하여야 한다. 신문다운 신문, 단순한 정보지에서 교단 내 이슈들을 속 시원하게 다루고, 교단 내 어떤 정치 세력의 눈치를 두려워하지 않고 옳은 것은 옳다하고 아닌 것은 아니라 하는 읽고 싶은 신문이 되어야 한다.


지금까지 침례신문은 교단 내 산적한 많은 문제들과 적당히 거리를 둔감이 없지 않다. 총회의 문제를 비롯한 각 기관들의 다양한 문제들이 실재하여 시끌시끌 한대도 못 본 척, 못들은 척 눈과 귀를 닫고 펜을 들지 않았다. 앞으로는 할 말을 하는 신문, 본 것은 본대로, 들은 것은 들은 대로 말할 줄 아는 신문이 되기를 소망한다.

그러나 침례신문이 그 신문으로서의 기능을 제대로 감당할 수 없는 배경에는 신문으로서의 정신을 잃어서 라기 보다는 다분히 경영상의 문제가 크다 하지 않을 수 없다. 최근 침례신문에 자구책의 하나로 침례신문을 후원해 달라는 후원 광고가 심심치 않게 실리고 있다. 심지어 신문 발행을 중단해야 하는 염려를 해야 할 정도로 열악한 상황이라고 한다. 직원들의 봉급도 제대로 줄 수 없는 상황이 되어 결원 된 직원을 채용하지 못하는 현재의 침례신문으로서는 정론지로의 기능을 기대할 수 없다.


침례신문은 어느 한 사람의 신문이 아니라 우리 교단의 신문이고 교단의 모든 교회의 신문이고 침례 교인들의 신문이다. 그러기에 침례신문을 침례교회와 침례교인들이 살려야 한다. 그깟 신문하며 무시하다 신문이 발행되지 않으면 가장 답답한 사람은 그깟 신문이라고 말한 사람들, 즉 침례교회와 침례교인들이다. 구독료를 내야 한다. 한 달에 짜장면 값 정도인 구독료 5천원이 없어서 구독료를 내지 않는 교회와 목사님 그리고 성도는 사실상 없을 것이다. 다만 침례신문의 가치와 신문을 보는 독자의 의무를 무시하기 때문이다.


그 가운데는 공짜 심리도 조금은 있지 않을까 싶다. 어느 독자는 말한다. 침례신문은 신문 같지 않다고. 그래서 보고 싶지 않다고. 구독료가 아깝다고. 솔직히 말해보자. 그러면서도 주말이면 침례신문을 기다리고, 침례신문의 기사를 근거로 교단 내 이야기를 하고 있지 않은가? 신문다운 신문을 원한다면 독자의 진정한 의무인 구독료를 납부하여야 한다. 누가 뭐라 하든 침례신문은 우리 교단의 얼굴이요 대변지다. 어느 날 도저히 경영을 할 수 없어 침례신문이 폐간이 되고, 직원들은 실직자가 되었다는 소식이 교계의 뉴스가 되기를 우리 교단의 누구도 원하지 않는다. 만의 하나 원치 않는 일이 현실이 되었을 때, 그것을 다시 일으켜 세우는 것은 지금의 것을 지키고 키우는 것보다 더 어렵다.


이제 우리는 새로운 의식을 가져야 한다. 교단지인 침례신문을 공짜로 보아도 된다, 구독료는 굳이 낼 필요가 없다, 신문다운 신문이 될 때가지 기다렸다 그때부터 구독료를 내면 된다는 의식은 문명사회를 사는 사람의 의식구조가 아니다한 달에 짜장면 한 그릇 덜 먹자. 그리고 침례신문의 구독료를 납부하여 신문다운 신문을 만들라고 강력하게 요구하자. 모두가 알다시피 지금 침례신문은 교단지이지만 교단의 지원보다는 개 교회와 교인들의 구독료로 운영된다. 광고비라는 것은 일반 일간지와는 비교할 수 없다. 일간지는 매일 광고가 실린다. 매일 수입이 발생한다. 하지만 침례신문은 주간지이고 광고라야 총회를 비롯하여 소수의 교회 광고가 전부이다. 이렇듯 비교조차 할 수 없는 것으로 침례신문을 경영하라고 요구하는 것은 잘못된 진단이고 처방이다.


침례신문은 오직 독자의 구독료로만 경영되기 때문이다. 내가 주말이면 펼쳐 읽는 신문의 활자를 타고 풍기는 잉크 냄새는 내가 낸 구독료를 통해 맡을 수 있어야 한다. 내 교회와 내 가족을 위해 필요한 것은 쓰듯이, 침례신문을 내 가족으로 여기고 독자의 의무를 제대로 감당하자. 1개월에 5천원이다. 1년은 6만원인데, 5만원으로 신문사가 섬긴다고 한다. 할 수 없어서가 아니었다. 우리는 그동안 그냥 공짜 신문을 보면서 의무를 다 하지 않았을 뿐이다. 자발적으로 양심에 부끄러움 없이 구독료를 지출하자. 침례신문사가 구제기관이 아니듯이 독자인 나도 어려운 신문사로부터 매월 5천원 구제받을 대상이 아니지 않는가? 한 달에 5천원 구독료를 납부함으로 기쁨을 누릴 수 있는 나, 한 달 5천원의 구독료를 받음으로 더 좋은 신문을 만들어 보급할 수 있는 침례신문을 만들자. 모두 어렵기는 하지만 경영의 위기에 직면한 우리의 신문을 살리는 사명을 감당하자.

그 사명은 독자 자신의 정당한 의무를 기쁨을 실행하는 일로부터 시작된다. 한 달에 짜장면 한 그릇 덜 먹으면 된다.

계인철 목사 / 광천중앙교회



배너

총회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