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신학계에서 20세기 가장 주목받았던 신학자의 한 사람이 ‘존 하워드 요더’이다. 요더의 주저 ‘예수의 정치학’(2007년 출간)은 출간된 지 30년이 넘었지만 아직도 신학을 공부하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읽어야 할 현대의 고전이다. 그런데 예수의 정치학은 필자가 2번이나 읽었지만 어려웠다. 그만큼 학문적으로 썼다는 것이다.
‘
명저(名著)는 난해(難解)하다’ 는 말을 벗어나지 않았다. 좋은 책이지만 누군가 전문가의 도움을 받아야 제대로 이해할 수 있는 책을 쉽게 누군가에게 추천할 수는 없다. 고민을 많이 했다. 그리고 본서와 같은 책이 나오길 기다렸다. 삶의 문제를 집어주고, 나름 도움을 줄 수 있는 요더의 책을 만나고 싶었다.
침례교 목회자들 중에도 요더를 모르는 분들이 많을 것이다. 그래서 대중적이며 쉬운 책으로 골랐다. ‘급진적 제자도’(죠이선교회). 요더의 제자들이 그의 신학사상을 대표하면서도 대중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내용들을 편집했다.
요더의 신학은 한 마디로 “평화주의”다. 복음서의 예수를 그대로 따라 살자는 것이다. 종교개혁이후로 기독교의 구원론은 로마서, 갈라디아서, 요한복음 중심의 도그마적 구원론이었다. 서구기독교는 다른 고민을 할 필요가 없었다. 모든 사람이 교회배경으로 태어나고, 교회 안에서 살다가 죽었다. 그런데 분쟁(전쟁)이 생길 때가 문제다. 분쟁은 항상 다른 사고에서 출발한다.
다른 사고(신앙, 해석)는 곧 다른 행동을 가져오고 그때마다 인간은 종교적 배경을 떠나 힘으로 매듭을 지으려 했다. 그간의 역사에 낭자한 피들이 흘려 내렸다. 그래서 지구촌 곳곳에 갈등과 저주가 떠다닌다. 바로잡아 지울 수가 없다. 지금도 진행 중이다. 타종교뿐만 아니라 같은 기독교안의 문제 역시 비슷했다.
요더는 메노나이트이다. 메노나이트는 아나뱁티스트의 한 분파이다. 16세기 종교개혁 때부터 아나뱁티스트 계열들은 한결 같이 작은 분파(分派)였다. 도시를 떠나 농촌에서 숨어서 자기들끼리의 공동체를 이루며 살아가는 신비에 싸인 사람들로만 서구역사에서도 취급했다. 그래서 그들을 급진적 사람들로 몰아 핍박도 했고, 죽음을 불사르는 그들을 보고 모른 체 무시해버리기도 했다.
최근 20세기 중반 들어서 특히 미국 백인, 기독교가 급격한 사회의 변화에 직면했다. 교통, 통신의 발달, 미국사회의 중동과 아시아 이민자들의 급격한 유입, 세속화로 인한 남부 바이블벨트의 무너짐 등은 이제 <주류> 기독교라는 단어 자체가 힘을 잃었다. 한 예로 최근 들어 미국 남침례교 성도들의(교회) 수적 저하, 신앙 충성도 저하, 재정의 악화로 인한 선교사들의 급감으로 나타났다.
왜 이런 일이 발생했을까? 남침례교외에도 미국개신교를 대표하는 미국의 연합감리교회, 미국장로교회 등은 고심할 수밖에 없었다. 오랜 시간 여러 가지 논의와 대안을 모색하던 중 성서적 대안을 오래전부터 실천하며 삶으로 표현하는 공동체를 발견한 것이다. 가장 세속화하지 않으면서도 성서의 복음을 지키며 살아내는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하는 공동체를 본 것이다.
말이 아닌 삶으로 변하지 않는 신앙의 근거를 보여준 것이다. 요더는 이런 공동체의 대변인 격이다. 왜 미국교회가 이렇게 급격하게 20세기 중반이후부터 힘을 잃고 방황하는가? 예수 복음에 대한 확신의 문제이다. 복음서의 예수의 삶이 유일한 대안이며, 구체적 대안이라는 생각이 기존의 교단 안에는 없거나, 약하다는 것이다. 외부의 적(타종교)이 문제가 아니라. 오랜 시간 복음의 생명성, 절대성이 붕괴되어져 왔다. 성서해석을 너무나 다양하게 하고, 사회와의 타협을 모색하다가 성서의 본질을 잃어버렸다. 아기를 목욕시키는 양동이 물을 버리려다가 그 속의 아기를 버린 것이다.
한국교회는 미국교회와 다른가? 전혀 그렇지 않다. 한국교회 130년의 역사에 가장 많은 영향을 받은 것은 성서가 아니라 미국교회이다. 그래서 동시대성으로 같은 문제를 안고 있다. ‘급진적 제자도’의 핵심은 <순응>이다. 성도(교회)가 복음서의 예수에 순종할 것인가? 아니면 세상과 타협하는 태도로 순응할 것인가?를 질문한다. 교회에서 성도들에게 가르치는 말씀에 대한 적절한 사회와의 대처가 성도들을 혼란에 빠뜨린다. 절대 신앙은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다.
말씀의 핵심인 예수의 삶에 순종하는 것이다. 르네상스시대의 구호였던 ‘나’를 버려야 복음서의 예수가 보인다. 요더는 평화주의 신학 즉 예수가 십자가에서 죽고 인류의 죄를 대속한 모습에 역점을 둔다. 성도들도 이 세상 너머에 있는 하나님나라 공동체에 목표를 두어야 한다는 것이다. 성도(교회)들이 자신을 잃어버리고 예수의 말씀처럼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는 말씀에 삶을 날마다 걸어야 한다. 이 가을 복음서의 예수가 왜 그런 행동과 말을 했는지 생각해 보면서 ‘급진적 제자도’를 읽어 보길 권면한다. 예수로의 급진적 방향 전환 없이 진정한 예수 제자가 될 수 없다.
/조성배 목사 반석중앙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