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청기도는 하나님께 주목하는 것으로 귀결된다. 예수님 발아래 앉은 마리아는 경청기도의 산 그림이다. 그녀는 “꼭 필요한 것 한 가지에 전심을 바쳤다” 하나님 앞에 잠잠해지는 법을 배우기란 어려운 일이므로 우리는 노력해야 한다. 연습하면 풍성해 지고 충만해진다.
‘경청기도’란 짜릿한 체험이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 임재를 누리는 데 주안점이 있다. 경청기도 중에 우리 하나님의 너그러운 성품, 즉 우리를 절대 포기하시지 않는 사랑, 억울한 상황을 뒤집으시는 능력, 능력을 자비로 조절하시는 온유하심을 묵상할 수 있다.
하나님의 후하심을 오래 묵상할 경우, 우리도 그 성품을 지니고 싶은 갈망이 생긴다. 하나님을 흠모할수록 우리도 욕심을 버리고 후해지고 싶고, 기회가 닥치면 움켜쥐기보다 베풀 가능성이 높다. 하나님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임재 연습’이란 바로 그런 의미이다. 나는 내가 하나님의 임재 안에 있음과 그분이 나를 사랑하심을 안다. 하나님이 나를 말할 수 없이 귀히 여기심을 나는 안다. 이보다 좋은 것이 또 있을까?
이런 기도로 하나님을 맛보아 알면 우리는 하나님과의 대화를 간절히 원하게 된다. 하나님께 그런 갈급함이 있으면 그 분과의 대화생활은 정상적이고 자연스러워진다. 대화를 통해 기도는 문제 해결만의 차원을 넘어선다. ‘웬디 라이트’는 이렇게 역설했다.
“고장난 데를 고치고 상한 데를 치유하는 것도 물론 영적 삶의 일부다. 그러나 그 이상이 있다. 영적구도자들은 인생을 해결해야 할 문제로 대하지 않고 그 안에 들어가 깊이를 재야 할 신비로 대한다”
이러한 시각은 문제가 있어야 하나님과 가까워진다는 생각을 일축한다. 우리는 위기의 순간과 동일하게 평상시에도 항상 하나님과 교감을 나눌 수 있다. ‘달라스 윌라드’는 “영적인 사람들은 자기 삶을 하나님과의 대화적관계에서 길어 올린다. 그들에게는 그 너머의 삶이 있다” 고 단언했다.
그 너머의 삶은 이 땅의 삶 전체에 침투한다. 우리를 산만한 것으로부터 끌어내고, 내 성격에 결함이 얼마나 실없고 부질없는 것인지 깨우치며, 그래서 그리스도를 위한 이타적 섬김으로 우리를 이끈다. 세상은 점점 나 중심이 아니라 하나님 중심이 되어 간다. 그 너머의 삶은 하나님과의 풍성한 대화로 충만하며, 그 분과의 연합된 삶에서 양분을 얻는다. 예수님 말씀이 이제 분명해진다.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님하면 그러하리라.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요15:4~5)
‘토마스 머튼’은 “우리는 ‘방법’이나 ‘시스템’을 찾을 게 아니라 ‘태도’와 ‘시각’ 즉 믿음, 개방성, 주목, 경외, 기대감, 간구, 신뢰, 기쁨을 가꾸어야 한다. 여러분이 그런 태도를 가꾸면 하나님은 당신의 영과 성품 속에 일하며 그리하여 여러분만의 경청기도 방법론이 창안된다”고 말했다.
‘장-니콜라스 그루’는 “기도 제목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가기보다 우리는 단순히 하나님께 마음을 열어놓고 무엇이든 그분이 가장 기뻐하시는 것을 우리 마음에 넣어달라고 기도해야한다”며 “무엇이든지 아버지께서 가장 기뻐하시는 것을 제 마음에 넣어주소서”라고 말했다.
다시 빚으시는 하나님께 내 마음을 열자, 하나님은 내 좌절을 은혜와 애정으로 바꿔 주셨다. 아침에만 해도 불가능해 보이던 일(속상한 마음을 떨치기)이 이제는 쉬워졌다. 마음을 열고 하나님께 주목하면 하나님이 내용을 정하셔서 우리 마음의 변화와 방향이 필요한 부분들을 만지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