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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 뇌 영혼 신 (심리학과 신앙에 관한 허심탄회한 대화)-2

인간 정신과 운명은 알고 보면 ‘케미스트리’(chemistry)에 불과하다. 여기서 인간은 동물과 차별되지 않는다. 인간은 자연의 속성에 굴복하여 자연의 일부로서, 몸이 통제하는 바에 따라서 자연에 종속된다. 그래서 인간 역사와 짐승의 역사가 다름 아니고, 벌레의 충동과 인간의 충동이 동일하다. 현대 과학에 의해서 인간 존엄성은 철저하게 사라진다.
인간에게 정신이라는 게 있기나 한 걸까? 아니, 있다 하더라도 정신이라는 게, 몸의 지배를 받는 몸의 현상을 그렇게 형이상학스럽게 설명을 할 뿐, 알고 보면, 정신 작용은 아예 없다. 사람은 몸이고, 몸은 화학 작용의 결과이고, 마음이니 정신이니 그리고 신앙 따위는 알고 보면 뇌가 만들어내는 의미없는 화학 작용에 불과하다.


그러나 인간 이해에서 이런 설명은 너무 허무스럽고 슬프다. 누군가의 말대로 인간은 우연히 이 세계 안에 존재하게 되어, 시간이 지나면 우주의 먼지로 영원히 사라지고 만다. 그러나 하나님 신앙을 토대로 하는 인간 이해는 이를 단호히 거부한다. 인간 존엄과 하나님 신앙과 과학을 통합해서 인간 삶은 그토록 무의미하게 결정된 바 없으며, 인간 존재의 방향과 의미와 목적은 끊임없이 인간을 몰아세워 사람은 짐승과 차원을 달리하는 인간 삶의 토대를 마련한다. 최근 논의되는 인간 이해에 대한 주요 이슈는 단연코, 뇌과학이다. 사람은 무엇인가? 그리고 마음과 몸은 무엇인가?


우리 몸과 마음/정신의 관계는 뇌과학에서 어떤 갈림길이다. 사람의 신체를 철저하게 화학 물질로 보는 입장은 대부분의 유물론적 입장이다. 하나님 신앙을 갖지 않은 뇌과학자들은 인간 행동은 몸의 화학 물질의 활동으로 환원되어 설명하거나, 진화심리학의 입장에서 인간 생존의 조건으로서 몸의 화학적 활동으로 이해하려 한다. 이렇게 말한다.


“당신은 신경세포와 그것들의 모인 분자들의 방대한 집합체 행동일뿐이다. ...당신은 뉴런들의 묶음에 불과하다.”
마치 피카소의 걸작을 단지 하얀 도포에 물감을 입힌 것으로 폄하하고, 베토벤의 9번 교향곡을 콩나물대가리로 분절시켜 단지 어떤 하나의 ‘소리’로 깎아내리는 것이고, 세익스피어의 햄릿을 까만 것은 글자이고, 하얀 것은 종이일뿐이라고 하는 것과 같다. 인간이 요 정도에 불과한가?


최근에 침팬지의 게놈 지도를 완성하여 해독한 바에 따르면, 사람과 침팬지의 DNA 서열이 96% 일치하는 것으로 밝혀졌다. 4%의 차이는 침팬지에게 치매, 암 등의 예방 유전자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겉으로 보기에 사람과 침팬지의 차이가 두드러져 보인다 해도, 몸의 구성 화학물질의 구조와 배열은 거의 같다. 친척일 뿐 아니라 거의 가족 정도의 계통이라 해도 크게 빈말이 아니다.


 사람과 동물은 몸의 내적 구조상, 먹고, 자고, 싸고 하는 생리 현상에서 차이는 거의 없다. 급기야 이런 실험을 한다. 아기 침팬지를 사람의 가정에 데려다 놓고 기른다. 침팬지는 여러 면에서 사람의 흉내를 내고 사람처럼 행동한다. 사람의 아이를 침팬지에게서 양육하면 사람은 거의 침팬지가 된다. 그러나 반대의 경우에, 침팬지가 거의 사람이 될까? 흉내를 내지만 언어의 의사소통에서 결국 경계선이 그어진다. 몸짓 발짓을 해서 간단한 의사소통이 되는 것 정도로 놀랐을 뿐, 사람과 동물의 차이는 어떻게 해볼 수 없을 정도로 크다. 사람은 사람이다. 침팬지는 침팬지일 뿐이다. 진화론은 나름 설득력을 지닌다. 하지만 여기까지!


현대 뇌과학 탐구에서 사람의 정신과 마음의 설 자리는 박탈된다. 마음은 비과학 시대에 유령같은 비물질로 인간 뇌를 지배하는 허깨비에 불과하다. 마치 맑시즘의 맥락에서 인간 도덕과 정신은 실상 물질 활동의 결과일뿐, 물질적인 토대를 지니지 못하면 그대로 헛것이 되고 만다는 생각과 유사하다. 하나님 신앙이 없는 자들은 인간 이해를 그처럼 물질의 측면에서 이해하면서 인간 정신을 별 것이 아닌 걸로 결국 깎아내린다.


그러나 그리스도인 심리학자들과 뇌과학자들 그리고 유물론에 빠지지 않은 과학자들은 인간 몸이 물질로 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마음과 정신은 몸을 벗어날 수 있을 뿐 아니라 오히려 몸을 지배하는 상황을 염두에 둔다. 물론 마음은 몸의 영향을 받지만, 동시에 또한 그 역도 가능하다. 마음이 순전히 몸의 결과는 아니다. 몸의 영향에도 불구하고 마음은 몸의 종속을 벗어나서 자유를 지닌다. 마음은 몸과 연합한다. 그리고 동시에 마음은 몸과 분리된다. 그래서 사람은 마음이다. 그리고 동시에 사람은 몸이다. 그래서 사람은 몸과 마음의 통일체이다. 인간 몸과 마음에 대한 이해는 이처럼 여전히 과학자들에게서도 역설과 모순으로 설명될 수밖에 없을 정도로 복잡하고 우리의 이해를 넘어선다. 여기서 인간 자유의 자리가 확보된다. 마음과 정신이 몸의 화학적 결과에 불과하다면, 인간 자유는 물리화학적인 결정론에 의해서 그 근거를 잃는다.


뇌과학의 입장에서 보면, 사람의 행동은 자유로운가? 어떤 사람의 폭력은 그의 뇌 손상에 기인하기도 한다. 뇌종양 때문에 충동에 못 이겨서 폭력을 행사할 때, 그의 폭력은 그의 자유로운 결정이기보다는 그의 몸이 만들어내는 폭력이다. 이때 사람의 자유는 매우 제한된다. 그럼에도 그의 폭력은 그의 몸의 활동으로만 설명할 수 없다. 그의 정신 활동이라는 또다른 인간 층위를 고려하지 않고, 그의 폭력을 몸의 활동으로만 환원해서는 안된다.


사람은 결국 화학분자와 원자로 구성되어진 몸이긴 하지만, 그 몸의 전체의 합은 부분의 합보다는 크다. 몸의 화학물질 전체는 몸 전체를 초월하는, 물질 활동과는 전혀 다른 초월 현상이 드러난다. 크리스천 과학자들은 이런 신비에 맞부딪히면서 경이(驚異)를 맛본다. 인간 몸의 화학물질을 플러스했는데, 결과는 화학물질을 뛰어넘는 정신과 마음이 터져나온다. 그리고 인간 자유와 신앙의 자리가 드러난다.
사람은 동물과 다르고 자연에 마냥 종속된 존재가 아니다. 인간 심리와 정체성을 자연과 그 부속물로 여기는 진화심리학의 결론은 마냥 인간을 동물로 축소한다. 하지만, 인간 인격과 언어, 철학, 문학, 음악, 미술, 과학, 종교라는 인간 특별함을 나타내는 이런 사실들은 과학자들이 엄밀하게 탐구할수록 결코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인간 고귀함의 특별함이다.


사람은 분자덩어리에서 진화해서 그의 독특성을 지니게 되었다, 그러나 진화심리학적인 입장을 단호하게 부정하기보다는 하나님의 신앙의 입장에서 수용할 수 있다. 진화심리학은 분자덩어리에서 동물로, 동물에서 사람의 독특성으로 진화되었다는 설명을 하면서 동물과 사람의 차이를 축소하려 한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를 완전히 긍정하지 않지만 인간의 독특성을 설명하는 메커니즘으로서 어느 정도 수용할 수 있다. 이것이 크리스천 지성의 역할이다.


인간과 동물의 차이는 점점 없어지고 있다. 진화심리학에 의하면, 인간은 동물의 수준을 어느 정도 벗어난다 해도 결정적이지 않다. 성경의 하나님 신앙에 의하면, 인간은 그의 하나님 형상 때문에 동물과 그 차원을 달리하고 그 심연을 결코 메울 수 없다. 그러나 저자는 여기서 인간 삶의 유일성과 독특성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그 소명으로 살아갈 때 비로소 동물의 차원을 벗어날 수 있다고 한다. 이는 인간의 존재론적인 다름의 차원을 약화시킨다. 존재를 달리하기 때문에 삶이 다르다. 인간은 존재 그 자체가 다르기 때문에 삶의 결이 다르다는 사실은 언제든지 그리스도인의 신앙에서 추론되어야 한다.

/ 김병제 목사(총회 기획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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