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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을 교회에 주기에 아깝다’가 아니기 위해

새해란 사실상 크로노스(chronos) 시간을 카이로스(Kairos)로 맞이하는 시간이라 할 수 있다. 고대 헬라오 로마 문화권에서 생각하였던 공간 속에 있는 운동으로 본 시간처럼 과거로부터 현재를 거쳐 미래로 흘러가는 시간이지만, 새해란 고대 히브리인들이 가졌던 의미로 채워진 사건, 즉 채워진 시간으로 경험하는 특별한 내용을 채워진 시간이라 할 수 있다.


이때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과거를 털어내고 새것으로 채워 넣어 이전과 다른 특별한 것들을 체험하는 시간들이 되기를 소망하곤 한다. 그래서 특별하게 맞이한다. 어제는 안 되었지만 내일은 잘 될 것이라는 막연하면서도 간절한 희망을 가지고 마음에서 특별한 의식을 치른다. 이때의 감정은 아주 특별하다. 왠지 겸손해지고 정결해 진다. 무엇인가 알 수 없는 진한 감정으로 자기를 통제하며 두렵고 떨림으로 새해로의 발걸음을 뗀다.


떠오르는 태양이 어제의 그 태양과 다르지 않음에도 새해 여명(黎明)에 만나는 붉은 태양은 객관적(客觀的)인 해가 아닌 주관적(主觀的)인 해가 된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그 태양을 가장 빨리 만날 수 있는 곳들을 찾아 밤길을 달려가고, 일부 어리석은 사람들은 태양 앞에 마음을 조아리며 기복의 제단을 쌓는다. 태양이 문제가 아니라 언제나 자신에게 모든 불행의 문제가 있었음에도 그것을 그대로 간직한 채 자신의 제단으로 태양을 부른다.


교회에서도 다르지 않다. 물론 그 대상과 의미는 다르지만 이때를 특별하게 여기기는 마찬가지다. 송구영신(送舊迎新)의 시간을 가지며 지금까지 인도하신 에벤에셀의 하나님께 감사하며 앞으로도 임마누엘의 주님이 되실 것을 믿음과 소망함으로 주 앞에 모여 예배드린다. 시간의 주인이신 전능하신 하나님께 모든 영광을 돌리며 감사드리고 변함없는 헤세드의 은혜를 구하며 송구(送舊)와 영신(迎新)을 하는 것이다. 지극히 당연한 일이고 옳은 일이다.


그런데 문제는 소위 약발(?)이 며칠 못 가는데 있다. 만약 우리가 특별한 의미의 시간인 새해에 결심한 것들을 그대로 행하며 살았다면 우리는 세상을 뒤집어도 몇 번은 뒤집었을 것이다. 송구영신을 통해 회개와 새로운 결단들이 새해라는 시간 속에 실천되어졌다면 한국 교회는 물론 대한민국이 오늘의 모습은 결코 아닐 것이다. 작심삼일’(作心三日)이라는 반갑지 않은 사고(思考)가 내면화(內面化)되면서 본능 아닌 본능이 된 듯하다.


새해의 효력은 새해의 다짐들이 행동이나 사건으로 결실될 때 비로소 발생하고 유지된다. 그러기에 송구영신예배를 통해 개 교회들이 하나님께 예배하면서 선포되었던 말씀과 받은 은혜를 따라 감동과 결단들이 새해의 삶들에서 실천되어져야 한다.


간절한 소망의 결단들이 형식적인 의식이 아닌 실제적(實際的) 실재(實在)여야 한다. 만약 그렇게 되면 교회와 우리 사회는 하나님께 더 가까이 다가가며 새로운 세상이 될 것은 분명하다. 그런데 고작 두어 주 지났는데 결심한 새것 보다는 곰팡이 냄새가 진동하는 어제의 것들이 벌써 눈가에 아른 거린다. 역시 그 태양은 그 태양인가 보다. 마거릿 미첼(Margaret Mitchell)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에서 여주인공스칼렛 오하라내일은 내일의 태양이 뜨겠지라는 말처럼 어제의 태양이 지고 내일의 태양인 새해가 왔지만 한 달도 채 지나지 않은 오늘의 일상은 어제의 태양과 벗이 된다.


무엇인가 새롭게 전개되어져야 하는데 삶은 묶은 해의 것들뿐이다‘. 그 나물에 그밥이 되는 듯하다. 정치, 경제, 문화, 교육은 물론, 국가와 세계 모두 어제의 문제를 그대로 가지고 와서 풀어 놓고 이전투구(泥田鬪狗)나 다름없는 모습들을 무뎌진 양심으로 습관처럼 연출한다.

그렇다면 교회는 어떤가? 목회자와 성도들의 모습은 좀 다른가? 솟아오르는 어제의 해와 다를 바 없는 해에게 복을 구하는 미신적인 것과는 다르게 전능하신 하나님께 회개(?)와 새로운 결단을 하며 송구영신예배를 드린 교회는 다른가?


말씀을 선포하고 말씀을 들은 목회자와 성도는 새해가 되어 얼마를 지난 지금 과언 지난해와 다른 모습인가? 새해의 다짐들은 지금 실천되어지고 있는가?

떠오르는 붉은 태양 앞에 머리를 조아리며 두 손을 모은 어리석은 자들이나 전능하신 하나님께 은혜를 구한 예배 자들과 별 차이가 없다면 우리는 이것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여전히 어제의 것을 답습하면서도 그것에 대한 별 감각이나 의식이 없으면서도 새해를 살고 있다고, 새것을 행하고 있다고 스스로에게 최면을 걸며 자기 합리화에 열을 올리는 것은 아닌지. 앞서 인용한 마거릿 미첼의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에서 스칼렛의 남편이었던레트의 말이 마치 책망이라도 하듯이 귀에 쟁쟁하게 들린다“. 나는 결코 깨진 파편을 참을성 있게 주워 모아서 접착제로 붙이고, 그렇게 붙이기만 하면 새것과 다름없다고 생각하는 인간이 아니오.”


지난해에 깨졌던 파편을 접착제로 다시 누더기처럼 붙여놓고 그것을 새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아닌지, 앞으로 남은 새해의 날들을 위해 새해 첫 시간의 결심을 다시 꺼내 보아야 한다. 만약 이 일마저 하지 않는다면 이미 죽은 것과 다름이 없다. 첫 사랑을 잃었다고 책망을 받는 에베소교회와 살아 있는 것처럼 보이나 실상은 죽은 사데교회와 같다.


겉으로는 존재하기에 분명 사랑하며 살아있는 것으로 보이지만 실제는 죽은 것이다. 이런 교회와 교회된 성도들에게는 희망이 없다. 하나님도 세상도 희망을 찾기 위해 이곳과 이 사람들을 찾지 않는다. 한 걸음 더 나가 신랄한 비판과 풍자로 사회의식 개혁의 펜을 휘둘렀던 극작가 조지 버나드 쇼(George Bernard Shaw)청춘은 청춘들에 주기엔 너무 아깝다는 말처럼 복음을 교회에 맡기기에는 너무 아까운 것이라는 생각에 이를지도 모른다. 심지어 주님도 노아 홍수 직전에 가지셨던 탄식처럼 교회에 세상을 구원하는 복음을 맡긴 것을 후회하시게 될지도 모른다.


테네시 윌리엄스(Tennessee Williams)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에 등장하는 블렌치처럼 이글거리는 욕망과 잠시 있다 사라지는 향수 같은 허위로 붕괴되는 내면 상태를 어제처럼 지속한다면 교회는 복음을 맡을 자격이 없다. 주님이 교회는 복음이 너무 아깝다고 탄식하실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직은 그래도 희망적이다.그 희망이 숨 쉬는 새해벽두다. 주님은 아직도 교회에 희망을 거신다.


그래서 교회가 교회답지 않아도 아직은 복음을 회수하지 않고 계신다. 윌리엄 셰익스피어의지금이 제일 비참하다고 할 수 있는 동안은 아직 제일 비참한 게 아니다라는 말같이 비록 지금 우리가 비참하다고 하지만 아직은 기회이다. 진정한 비참함을 경험하기 직전이지만 아직은 다시 새롭게 시작할 수 있는 은혜의 시간이다. 유턴 신호를 몇 번 놓쳤지만 저 앞에 유턴 신호가 하나 더 남아있다.


우리는 히브리인의 시간관처럼 이제부터라도 복음적 행동과 복음적 사건을 일으켜야 한다. 환경과 세상이 비록 우리를 돕지 않아도 하나님의 도우심을 믿고 복음으로 행동하면 복음화 된 환경과 세상이 된다. 너무 멀리 온 것은 맞지만 지금이라도 탕자처럼 주님의 뜻으로 돌이키면 돌아선 그곳, 그 방향에서 주님의 얼굴을 대면한다.

교회와 나에게 복음을 맡긴 것을 후회하시는 주님의 눈물을 보기 전에, 교회에다 희망을 걸었던 것을 더 참담하게 후회는 세상을 목격하기 전에 진정한 우리의 새해 다짐, 그 결단을 살아야 한다. 새해 굳게 다짐한 복음으로의 삶을 바람개비 돌리기 위해 앞으로 달려가듯이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 앞으로 다시 달려 나가야 한다. 환하게 웃으시는 주님의 얼굴을 믿음으로 상상하면서.

계인철 목사 / 광천중앙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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