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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임한 목회자는 좋은 계모와 같다

한 교회에서 오래 목회할 수 있는 것은 복이라 생각한다. 여러 목회지를 경험하는 것도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뜻이 있고 배우는 것도 많지만, 하나님의 아주 특별한 뜻이 아니라면 한 곳에서 진득하게 오래 목회할 수 있다면 좋을 것이다. 목회지 문제는 내적으로 본인의 성향과 상황도 있고, 외적으로 교회의 여건 등도 있을 것이다.


나의 목회 역사는 한 곳이다. 지금 목회하고 있는 교회에 32년째 몸담고 있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1년은 초대 청년회장을 했고, 이듬해부터 동역을 했다. 그러나 나는 개척 멤버는 아니다. 창립 10개월쯤에, 이 교회가 좋아서 새가족반 교육을 받고 일반 성도로 등록했다. 당시 신학생이었지만 밝히지 않았다. 그런데 틈만 나면 주변에 복음을 전하고 구원 상담을 하는 모습을 담임목사님이 보게 되셨고, 야간 신학생임을 알게 되어 전임전도사를 제안하여 목회에 첫 발을 내딛게 되었다.


그리하여 10여 년간 전도사와 목사로 동역을 하다가, 20년째 담임목사로 섬기고 있다. 그러니 우리교회 33년 역사 거의 전부를 함께 한 셈이다. 그간 수많은 목회자가 우리교회를 거쳐 갔고 함께 하고 있다. 이를 지켜보면서 부임한 목회자는 좋은 계모와 같다는 생각이 든다. 어떤 목회자는 처음부터 아예 특권과 차별화를 갖고 나는 목회자다!’라고 윗자리를 차지하고서 가르치려고 하는 계모 같은 이들도 있지만, 거의 대부분은 성도들을 섬기고 잘 해보려고 애쓰는 모습을 보면 좋은계모와 같다고 여겨진다.


그런데 왜 어감이 썩 좋지 않은 계모라는 꼬리표를 떼지 않는가? 부임하기 전부터 그 교회에 있던 기존 성도들을 낳거나 그들과 함께 해오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그게 뭐가 그리 중요하고 대수인가? 사실 그리스도 안에서 그게 그리 중요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부임한 목회자들은 일단 계모임을 인정하고 들어가서, ‘생모와 같은 사랑으로 함께 하려고 애쓰고 배려해야 할 필요가 있겠더라는 것이다.


새로운 동역자가 오면, 새로운 각오로 잘 해보려고 한다. 대체로 순수하고 열정도 있다. ‘나름대로지금까지 목회자 훈련을 받고 준비한 한 가락씩이 있다. 그런데 그 나름대로 한 가락이 교회에 어려움을 주곤 한다. 자기가 좋아하고 잘하는 그 한 가락을 펼쳐 보이려고 한다. 전임자와 차별화 전략을 그 한 가락으로 하려고 한다. 그것을 발판으로 그 위에 우뚝 서려고 한다. 은근히 ~ 이번에 온 목회자는 실력 있다. 설교를찬양을일을잘 한다. 겸손하다. 경건하다는 말을 듣고 인정받고 싶은 마음을 갖기 쉽다.

 

가정으로 돌아와서 생각해 보자. 새엄마가 들어왔다. 아이들 입장에서는 어떤 엄마가 좋은 엄마일까? 당장에 맛있는 것 많이 해주고 놀이동산 자주 데려가 주면서, 그전에 엄마랑 찍은 사진을 지워버리는 새엄마일까? 그전 엄마가 못된 엄마였다면 모를까, 웬만한 엄마였다면 돌아가셨든지 이혼했든지 미운 정 고운 정이 깊이 배어있기 마련일 것이다. 지혜로운 새엄마라면 예전의 생활방식이나 분위기 인테리어 등을 되도록 보존하면서, 보완할 부분을 조금씩 잘 채워갈 것이다.


처음부터 너무 자신의 존재를 각인시키기 위해 예민하지 않을 것이다. 자신의 초상화를 크고 선명하게 내걸려고 하지 않을 거란 말이다. 그전에 그들이 어떻게 살았는지, 뭘 좋아했는지, 왜 이 액자가 여기에 걸려있는지, 가정의 분위기와 생활방식이 어떠했는지자기 기준으로 쉽게 판단하지 않고, 애정 어린 눈으로 살펴보고 잘 간직하고, 조금 손보면 좋아질 것이 무엇인지 지혜롭게 자신이 잘 할 수 있는 것으로 세워나갈 것이다.


교회에 부임하면 담임목사든 부서담당 사역자든 대개는 뭔가를 보여줘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히기 쉽다. 물론 그 배경은 청빙한 이들의 무언의 요구이기도 하다. 새로운 목회자가 오면, 교회에 새바람이 불고 부흥하고 이상적인 교회로 바뀌리라 기대하고, 전임 목회자의 약점이나 무능을 은근히 지적하면서 직간접으로 압력을 넣는다고 한다. ‘뭔가를 보여줘야 한다는 것이 자신의 존재 목적이 되고, 차별화해야 한다는 부담이 처음부터 어긋난 길로 가게하기 쉬운 것이다.


그때 내 자신을 솔직히 돌아볼 필요가 있다. 내가 그 전 목회자들보다 특별히 더 탁월한 능력의 소유자일까? 내가 보여줄 수 있는 것이 무궁무진한가? 내가 신학교 다닐 때는 일등 했는가? 나의 웅변력이 대통령상을 받을 만 했고, 도산 안창호 선생처럼 심금을 울리게 연설을 잘 하는가? 찬양인도는 성령의 깊은 은혜의 바다로 인도할만한가? 내가 성경에 달통했는가? 온전한 기도의 사람인가? 구원상담의 달인인가? 친화력이 뛰어나고 전도를 잘 하는가? 헌신도와 사랑은 짐 엘리엇처럼 총을 품고 있으면서도 사용하지 않고 원주민들의 창끝에 찔려 죽어갈 수 있는가? 이 중에서 정말 자신 있고 시원하게 꼽을만한 것은 몇 가지나 될까? 대개는 도토리 키 재기 아닐까?


그런데 특별히 뭔가를 보려주려고 하면 곧 그 바닥을 드러내게 될 테고, 그러면 그때는 내게서 실망하고 떠나는 사람들의 뒷모습을 처연한 심정으로 바라보고, 내 편을 만들려고 구차하게 발버둥치고, 자기변명을 늘어놓게 되지 않을까? 흔히 그 기간이 3~5년 정도라고 하는데.


자기 내면의 영적 힘이 약하면, 프로그램이나 이벤트 등으로 유지하고 끌고 가려는 경향이 많다. 설교 한 번 하는데도, 신경이 예민해지고 끙끙대며 이 책 저책 뒤적여서 설교원고를 겨우 만들어야 할 정도라면 목회가 재미있을까? (정말 좋은 영의 양식을 위해 온 힘을 기울인다면 착하고 충성된 종아!’ 주님께서 칭찬하시겠지만!). 좋은 예화거리나 동영상에 맞춰서 본문을 잡고 설교하려는 약은 수를 쓴다면, 교회의 방향성이 제시되고 성도들의 양식이 될 수 있을까?


생수가 철철 흘러넘치지는 않더라도, 언제든지 떠 줄 정도는 되어야 하지 않을까! 많이 해보지 않았던가? 부흥회나, 무슨 학교, 무슨 훈련 프로그램에 요즘은 성도들의 참여도도 적을뿐더러, 약발도 며칠이나 몇 개월을 넘지 못하다는 것을! (물론 어떤 성도들에게는 그것이 좋은 계기가 되어, 지속적으로 주님과 친밀한 교제를 나누며 말씀과 은혜 가운데 일생의 큰 전환점이 되기도 하니, 필요하고 고마운 것이기도 하다.)


목회는 많은 요소가 요구되는 종합예술’(?)이지만, 그 출발은 무엇보다도 주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사람들을 사랑하는데서 비롯되어야 할 것이다. 십자가의 은혜와 부활의 권능! 부활하셔서 우리를 사랑하시고 전지전능하신 능력으로 동행하시는 예수님을, 항상 주인으로 모시고 살아갈 때 생수가 흘러넘치는 것을 경험한다(14:7~9).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 실제가 될 때(2:20), 목회에서 자기를 들어내려고 애쓰지 않아도 된다.


내 힘이 아닌 주님의 능력으로, 나를 통해서 주님이 하시기에 목회는 쉽다. 본질적으로 설교는 내가 경험한 예수 그리스도를 증언하는 것이기 때문에, 감히 건방지게 말하거니와 설교도 쉽다(내가 예수님을 만나고 경험한 것이 적은 것이 문제이지!). (교회 규모는 좀 다른 문제다.) 그러나 십자가와 부활이 나의 실제적 사건과 만남으로 나의 주인 되심으로 이루어지지 않으면, 설교도 어렵다. 목회도 어렵다. 그 자리를 버티고 있어야 하고 대우라도 받을라치면, 껍데기 포장을 요란하게 하고 명함에 작은 글자로 뭔가를 빽빽이 채워 넣고 인간적으로 자기 자신을 드러내려 발버둥이라도 쳐야겠지!


처음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왜 부임 목회자는 좋은계모가 되어야 할까? 교회는 연속선상에 있기 때문이다. 뽑혀서 부임하게 되는 데는, 그가 꼭 해야 할 일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보내신 것이라 믿는다. 그러나 그보다 먼저, 그가 부임하기 이전부터 하나님께서는 그 교회를 세우셨고 이끌어오셨다. 새로 부임한 담임목사가 주체가 아니라, 하나님이 주체이시다. 부임한 그 목회자 이전에도 동일하게 어떤 목회자를 선택하셔서 지금까지 이끌어 오셨다는 사실이다(목회자에 따라 부흥과 쇠퇴의 오르막내리막이 있을 수 있지만).

지금까지 하나님께서 쭉 섭리해 오신 것이다. 부임 목회자는 뒤집어엎는 혁명군이 아니라, 릴레이 바통을 이어받아 달리는 사람이다. 목회자를 위해서 교회가 있는 것이 아니라, 교회를 위해서 목회자가 있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기도 하지만, 우리교회 목회에서도 좀 아쉬운 생각이 드는 때가 있다.

전에 음악목사님이 있었을 때 자체적으로 작사도 하고 작곡도 하고 찬양도 하고 연주도 하고찬양테이프와 찬양CD2개나 만들었다. 주일예배나 행사 때도 가끔 그 찬양들을 했는데, 우리의 기도와 신앙 그리고 작업 과정 등이 고스란히 녹아있어서 새로운 은혜를 경험할 수 있었다. 그런데 그 이후에 온 목회자(찬양인도자)는 그 찬양을 몰라, 악보를 통해 배우기도 하지만 함께 한 과정이 없으니 애정도 적을 수밖에 없다. 따라서 자연스레 거의 사라지게 되었다.


이렇듯 계모는 그 이전의 역사(하나님과 함께 했던 사건 일 공감대) 등이 없고, 현재와 미래뿐이어서, 남아있는 대부분의 성도가 갖고 있는 아름다운 정서나 추억 등이 낙엽처럼 사라지고, 고지를 점령하라는 구호와 깃발과 훈련에 내몰리기 일쑤다. 과거에 함께 하지 못한 것은 누구의 잘못도 아니다. 하지만 부임한 목회자를 맞이하는 그 교회 성도들은 그것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는 점이다.

목회자는 자기의 비전을 펼치는 사람이라기보다는, 먼저 그 교회를 섬기는 사람()임을 잊지 않아야겠다. 꼭 자기의 비전을 강력하게 펼치고 싶다면, 개척 창립하는 것이 지름길이 아닐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