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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과 우울

고성우 목사 / 반조원교회

시골의 작은 교회에서 20여 년간 목회하다보니 지금까지 돌아가신 성도들의 수가 남아계신 성도들의 수에 거의 육박한다. 돌아가신 분들 중 몇 분 교통사고로 돌아가신 것을 빼고는 대부분 급만성 질환으로 돌아가셨다. 그런데 단 한 분이 사고나 아무런 질병이 없었는데도 돌아가셨다. 물론 자살한 것은 아니다. 그야말로 노쇠하여 몸에 아무런 기력이 남지 않아 돌아가신 것이다.

그 분은 연세는 많으셨지만 평소 건강하고 총기도 좋으신 집사님이셨는데 어느 날 주일 예배에 빠지셨다. 같이 살고 있는 딸이 연락해오기를 기운이 없다고 누워계신다는 것이다. 심방을 갔더니 아이고 목사님! 뭐 하러 오셨슈. 아픈 데는 없는 디 그냥 기운이 없어서 들어 누었더니 더 기운이 없어져서 교회도 못 갔네유.”라고 하시는 것이었다.


딸의 말을 들으니 입맛 없다고 며칠 전부터 밥을 잘 안 드시더니 저렇게 들어 누우셨다며 어디가 편찮으신지 검진하려고 대학병원에 예약했단다. 며칠 후 병원에 다녀온 딸에게서 연락이 왔는데 몸은 아무 이상 없이 건강하다는 것이다. 단지 기운이 없을 뿐이어서 영양주사 한 병 맞고 왔다는 것이다.

다시 심방 가서 식사 잘 드시라고 말씀드리니 웃으면서 알았다고 걱정마시라고 하셨다. 하지만 계속 예배에 나오시지 못했고 딸은 엄마가 여전히 식사를 잘 하시지 않으신다고 심방할 때마다 걱정했다. 그때마다 식사를 잘하시라고 마치 아이처럼 달래기도 하고 야단치기 까지 했지만 대답만 할 뿐 변화는 일어나지 않았다. 그 뒤 자식들이 다시 다른 병원에 모시고 갔지만 역시 몸에는 아무 이상이 없다는 결과만 나왔다. 서서히 기력이 쇠하여 간 집사님은 결국 이 년 후 돌아가실 때까지 한 번도 주일예배에 참석하지 못했다.


그런데 십여 년이 지난 이제와 생각하니 그 때 나는 아주 중요한 점 하나를 간과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것은 그 집사님이 왜 밥을 먹고 싶지 않을 만큼 입맛이 없었을까 하는 점이다. 물론 노인이라 미각이 쇠퇴하기도 했겠지만 몸에 다른 병도 없고 기능도 정상이었다면 그것 때문에 밥을 못 먹을 정도라는 것은 말이 안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것은 마음의 문제였을 가능성이 매우 높은 것인데 나는 그 점을 전혀 고려하지 않았던 것이다. 어쩌면 그 집사님의 평소 언행뿐만 아니라 가끔씩 혼자 예배당에서 철야기도도 할 정도의 열심을 지켜본 나로서 그 분의 신앙에 대해 나름 후한 점수를 주고 있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또한 당시 그 가정의 내막을 비교적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 부분에서도 별다른 문제점을 못 느끼고 있었고 그런 이유들로 그 집사님의 마음을 깊이 살피려 하지 않았던 것 같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때 그 집사님은 우울증에 걸린 것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물론 정신의학적 진단을 할 수도 없는데 그런 판단을 한다는 것은 섣부르고 주제넘은 짓일 수도 있지만 말이다. 그러면 구원받은 그리스도인도 우울증에 걸릴 수 있는가? 정신과 의사도 심리학자도 아니지만 나는 그리스도인도 우울증에 걸릴 수 있다고 생각한다.


엘리야는 하나님의 놀라운 권능이 자신을 통하여 나타나는 체험을 했다. 사람은 뭔가 큰일을 해냈을 때 심리적 공허를 일시적으로라도 경험한다. 배우가 연극이 끝나고 불 꺼진 텅 빈 객석을 바라볼 때 느끼는 감정 같은 거다. 게다가 그런 큰 일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아합과 이세벨은 변하지 않았다.

그 놀라운 하나님의 권능 앞에서도 변하지 않는 그들을 볼 때 절벽 앞에 선 것 같은 좌절을 경험했을 것이다. 게다가 자신을 죽이겠다는 협박까지 하자 순간 두려움이 엄습했을 것이다. 그런데 자기 옆에는 자신을 공감해주고 지지해 줄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처절한 고독이 그를 더욱 힘들게 했을 것이다. 이러한 엘리야의 감정 상태는 성경에 나타난 그의 행동과 기도를 통해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로뎀나무 아래 누워 죽기를 자처하는 엘리야의 모습은 극심한 우울증에 걸린 사람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물론 정신의학적 기준에 의한 우울증이 아닌 우울감 수준이라고 할지도 모르겠지만 여하튼 우울 상태에 빠져있는 것은 분명하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도 누구든지 우울증에 걸릴 수 있다고 보는 것이 틀리지 않을 것이다. 물론 성령 충만하면 성령의 열매를 풍성히 맺는데 우울할 틈이 어디 있느냐고 한다면 더 이상 할 말은 없지만 말이다.

그러한 엘리야를 하나님은 어떻게 다루셨는가? 하나님은 엘리야에게 믿음이 없다고 나무라지 않으셨다. 그럴수록 더 기도해야지 그게 무슨 망언이냐고 야단치지도 않으셨다. 영력이 떨어져서 그러니 금식해서 더 성령 충만 받으라고도 안 하셨다. 우리가 다 아는 대로 다른 말씀 없이 먹이고 재우셨다. 그리고 칠천 명의 동지가 있음을 알려주셨다.


모든 성도들이 성령 충만한 것도 아니고, 신앙의 성숙도도 다 다르다. 더욱이 그들의 처한 삶의 정황도 다 다르다. 누구라도 우울상태에 빠질 수 있다. 시대의 상황인지 주변에 우울증에 빠지는 사람이 자꾸 느는 것 같다. 어쩌면 예전에는 그냥 그러려니 하면서 살아 몰랐는데 이제 자꾸 이름을 붙이니 더 많아진 것처럼 느끼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여하튼 그 때 목사는 하나님께서 엘리야를 대하신 것처럼 원인분석이나 해답을 가르쳐주려는 것보다 공감하고 위로하고 지지하고 품어주는 것이 먼저다. 아무 때나 자꾸 가르치려는 것은 목사에게 흔한 직업병이다. 그래서 나는 기도한다. 잘 공감하고 지지할 줄 아는 목사가 되게 해달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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