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Nudge의 大家이신 예수님

윤양수 목사 한소망교회

간디는 나라를 망치는 일곱 가지 사회악을 원칙 없는 정치, 노동 없는 부, 양심 없는 쾌락, 희생 없는 신앙, 도덕 없는 경제, 인간성 없는 과학, 인격 없는 교육이라고 말한다. 어느 것 하나 껄끄럽지 않은 것이 없으나 특별히 오늘 더 목에 걸리는 것은 인격 없는 교육이다. 요즘처럼 평생교육의 場을 많이 펼치고, 배우기는 항상 배우나 진리의 지식에 이를 수 없는(딤후3: 7) 이유가 무엇일까?


주자(朱子)는 배움을 권면하는 글에서 촌음을 아껴 배움에 열심을 다하라고 권하며, 성경에서도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고 말씀하신다. 그런데 이런 열정적인 가르침을 주시는 스승이 겸비해야 하는 것이 바로 바울이 “너희는 내게 배우고 듣고 본 바를 행하라”고 당당하게 말한다. 우리 주님도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말씀하시면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눅10: 36)”고 말씀하신다.


“스승됨”에 대해서 생각해보는 달인 오월에 人格있는 敎育을 몸소 보이신 주님의 교육방법은 요즘말로 “넛지(nudge)”의 개념을 승화시킨 것이 아닌가 싶다.
원래 nudge는 “(특히 팔꿈치로)옆구리를 슬쩍 찌르다”는 말로, 시카고 대학에 리처드탈러교수(넛지 “똑똑한 선택을 이끄는 힘”의 저자)가 말하는 넛지는 강요가 아니라 “이런 건 어때요?” 라고 보여주는 즐거운 권유 같은 것이라고 한다.


넛지의 좋은 일례로, ‘아프리카의 어린이들이 어떻게 하면 보다 건강하게 성장할 수 있을까? 손만 잘 씻어도 많은 질병을 예방할 수 있는데….’이런 고민을 하던 봉사단체가 있었는데 아프리카 어린이들에게 비누를 나눠 주는 것이었다. 그 비누는 평범한 비누가 아니라 다 쓰고 나면 거기서 작은 장난감 자동차가 나타나는 그런 비누였다. 아이들은 장난감을 빨리 갖고 싶어 열심히 손을 씻었고 그 결과, 의료진도 아프리카의 어린이도 모두 만족할 만한 결과를 얻었다고 한다. 손을 씻으라고 강요하지 않고도 어린이들이 자발적으로 손을 씻도록 만든 방식으로 평가받고 있다.


또 다른 예는, 계단 오르기가 건강에 좋다고 백번 강조하는 것보다는 계단을 오를 때 가야금 소리가 나도록 하고 그 계단에 오르는 사람의 수만큼 기부를 하도록 고안된 서울 시청의 계단과 동일한 예는 대전시청역의 2번 출구 계단도 계단을 오를 때마다 피아노 소리를 나도록 해서 생활 속에서의 건강을 유도하고 있다. 브라질에서는 안전벨트 착용률을 8%에서 100%로 끌어올린 사례가 있었다고 하는데, 물론 택시 이용객에 한정된 사례이긴 했지만 택시에 탔을 때 안전벨트를 매면 공용 인터넷(wifi)를 사용할 수 있도록 했더니 모든 승객이 안전벨트를 착용했다고 한다.


아무리 좋은 것도 강요하는 건 바람직하지 않다. 강요에 의해 몸은 잠시 움직이게 할 수 있어도 마음까지는 움직일 수 없는 것으로 보아 교육에도 육아에도 연애에도 우정에도 넛지가 반영될 수 있겠다 싶다. 즐겁고 은근한 권유를 위해 어떤 방법을 마련해볼까?’그렇게 마음을 써보는 시간이라면 좋겠다.


돌이켜보면 어릴 적 수련회에서 말씀구절을 암송해야만 밥을 먹게 한 일은 심한 넛지 방법이긴 했던 것 같다. 투박한 방법이긴 했지만 그 당시 선생님의 마음이 새록새록 느껴지는 것을 보면 세련된 넛지 방법만이 학습의 효과를 높이는 것은 아닌 것 같다. 오늘날 우리가 교육현장에서 사용하는 다양한 넛지 도구들은 넘쳐나는데 한낱 도구에만 머무르고, 학습자의 흥미유발차원에서만 끝나는 이유는 무엇일까?

삶이 배제된 일만 스승의 모습만 있기 때문은 아닐까? 나의 모습 중에도 이런 모습이 많지 않은가? 본질보다 현상에만 급급하는 교육자들이 많아져서 그런 것은 아닐까? 교육가족의 일원으로 섬겨야하는 중책을 맡은 시점에서 인격있는 교육을 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는 어떤 일들을 해야 할까를 헤아리는 시간들이 많아지고 있다.


간음현장에서 잡힌 여인과 그 무리에게 모세의 율법보다 완성도 있는 주님의 말씀-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돌로 치라-은 학습자에 대한 깊은 사려와 진정한 교육이 지향해야 할 점이 무엇인지를 고민하지 않으면 나올 수 없는 神의 한수이다.
나사로의 무덤 앞에서 마리아가 우는 것을 보시면서 불쌍히 여기시며 눈물을 흘리시는 모습(요11:34~5) 또한 하나님의 아들이신 분이 이리도 사람을 사랑하시는 힘은 어디에서 시작될까? 기도 외에는 이런 유가 나갈 수 없음(막 9: 14-49)을 말씀하시며 한적한 곳에서 아버지와의 긴밀한 교제를 놓지 않으셨기에 가능한 일이 아니었겠는가?
고요한 시간에 앉아서 다시 읊조려 본다. 주님! 이 깊은 고독과 외로움 속에 당신을 느끼기를 원합니다. 아버지가 나의 아버지 되심을 그리고 나의 친구이심을 그리고 나의 모든 인생의 결정자이심을!




배너

총회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