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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흰’에 담겨진 의미

독자 서평
정상순 목사 남부중앙교회

한강 지음 문학동네 132쪽 11500원


이 책을 만난 것은 경남양산중학부모독서토론회에서다.

매 달 1권씩 선정해 토론하는 모임인데, 올해 10월에는 이 책으로 독서 토론을 했다. 이 ‘흰’이 무엇을 의미하는 지 궁금했다. 색에 대한 글, 아님 노인에 대한 글, 아니면 순수함에 대한 글 등 여러 가지 생각을 하게 했다. 또 한 가지가 있다. 분명이 소설로 알고 있는데, 카피 글, 시, 짧은 단상처럼 다가왔다. 처음 접해보는 담백한 소설책이었다. 분명히 이 책은 소설이었지만, 처음 보는 유형의 소설책이었다. 이 책을 처음 만났을 때의 느낌은 작고 얇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부담 없이 읽을 수 있겠다 싶었다. 두께는 얇았지만 내용은 대단히 두꺼웠다. 책장이 쉽사리 넘겨지지 않았다. 깊이 빠져들어야 한다는 사명감 때문에 반복에 반복을 더해 읽어야 했기 때문이다.


이 책은 저자가 ‘흰 것’에 대해 썼다. 흰 것의 가짓수가 이렇게 많은지 처음 알았다. 65개의 흰 것을 그렸기 때문이다. 이 책은 65개의 단어를 ‘나’, ‘그녀’, ‘모든 흰’ 3개 파트로 나누어 소개한다.
“저자는 왜 수많은 색깔 중에 유독 흰색에 관한 글을 썼을까?”라는 의문은 이 책을 읽는 내내 떠나지 않았다. 특별히 눈에 들어온 것은 ‘내 어머니가 낳은 첫 아기는 태어난 지 두 시간 만에 죽었다고 했다.’로 시작하는 ‘배내옷’이다.


23세의 엄마가 초겨울에 첫 아기를 혼자서 낳고, 흰 천을 찾아 산통을 참아가며 바느질을 했다. 그리고 작은 배내옷을 만들었다. 그러나 그 아기는 두 시간 만에 죽었다. 살아있다면, 저자의 언니가 되었을 것이다. 엄마로부터 들었을 이 사건은 저자에게 아주 강렬한 느낌을 주었을 것이다. 특별히 흰 색에 대한 남다른 느낌을 갖게 되지 않았을까 추측해본다. 그렇게 추측하는 또 다른 이유가 있다. 저자의 65개의 목록 중에 아기에 관한 목록이 꽤 있다는 데서 찾아볼 수 있다. 배내옷 외에도 강보, 젖, 그녀, 초, 경계, 당신의 눈, 수의, 언니, 작별 등이다.


이러한 목록이 다 세상에 나온 지 2시간 만에 죽은 언니에 관한 글이다. 그리고 1부 ‘나’와 3부 ‘모든 흰’에 집중적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렇지만 이것은 저자에게 확인해보지 않은 나만의 추측이지 사실이 아닐 수도 있다.
사실이 아닐 수도 있다고 말한 이유가 있다. 그것은 저자의 상상력이 뛰어남을 알기 때문이다. 한강이라는 저자를 3년 전에 책을 통해서 만났다. 그 때도 학부모독서토론회 때 만난 책이었다. 광주 5·18 민주화운동의 내용을 배경으로 하여 쓴 한강의 장편소설 ‘소년이 온다’라는 책이다.


그 책을 읽으면서 가장 놀랐던 부분은 어린 중학생이 죽임을 당하여 어디론가 군용차량에 실려가게 된다. 5·18 당시 많은 행방불명자가 있었지만 그들이 어디로 갔는지는 군관계자 외에는 모른다. 목격자도 없다. 따라서 그 상황을 쓸 수도 없었을 것이다. 그 부분은 군이 가장 감추고 싶은 치부일 것이다. 그런데 소설가 한강은 죽은 주인공 학생의 몸에서 영혼이 빠져나와 그 상황을 낱낱이 폭로한다. 이 부분을 보면서 작가는 신과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얼마든지 상상력을 동원해서 감추어진 사건도 간접적으로 폭로할 수 있구나’라는 생각을 했었다. 그 때 소설가 한강의 상상력에 놀랐던 경험이 있기 때문에 ‘흰’에 등장하는 언니에 대한 내용이 사실(fact)이 아닐 수도 있다고 말한 것이다.


‘흰’에서 개인적으로 특별히 인상적인 부분이 몇 가지 있었다.  ‘흰 개’라는 부분은 우리가 어렸을 때 수수께끼에서 많이 사용한 답이다. ‘개는 개인데 짓지 않는 개는?’ 답은 ‘안개’다. 소제목 ‘흰 개’는 바로 ‘안개’를 뜻하는 것이었다. 처음부터 힌트를 주고 시작한 글이지만 좀 둔한 나는 처음엔 ‘안개’를 뜻하는지 몰랐다가 읽으면서 알게 되었다. ‘안개’에 대하여 이렇게도 의미를 부여할 수 있구나 생각하며 입가에 미소가 흐르게 했다. ‘재’라는 부분은 ‘어머니의 뼛가루가 담긴 유골함’에 관한 것이다. 짧은 글이지만 소제목 ‘재’라고 표현하는 부분에서 인상적이었다. 다른 사람이면 모르지만 ‘어머니의 유골함’을 ‘재’라고 부르기가 내겐 좀 어색한 것 같다. 하지 만 저자는 솔직한 표현을 함으로써 ‘인생의 허무함’, ‘인생무상(人生無常)’이 더욱 리얼하게 다가오게 만든다.


‘수천 개의 은빛 점’은 ‘아홉 살 난 그녀’가 작은 아버지와 배를 타고 경험한 것을 그리고 있다. ‘어린 그녀’는 배 밑에서 반짝이며 빠르게 움직이는 멸치 떼를 ‘수천 개의 은빛 점’으로 표현한 것이다. 그리고 이 표현은 마흔을 넘기지 못하고 알코올 중독으로 세상을 떠난 ‘그녀의 작은 아버지’의 짧은 생애가 같이 겹쳐지게 함으로써 인생이 순식간에 지나감이 느껴지게 한다. 인생의 유한함이 강하게 느껴지게 한다.
‘흰 돌’은 오래전 ‘그녀’가 바닷가에서 주은 흰 조약돌에 관한 글이다. 일반 사람들은 별 느낌이 없을 흔한 조약돌에서 ‘힌 돌’을 주어와 그 돌에서 ‘침묵’이라는 의미를 끄집어 낼 수 있다는 저자의 감수성이 놀라웠다.


‘빛의 섬’은 무대에 오른 ‘그녀’에게 강한 조명이 위에서부터 쏘아져 내릴 때의 모습에 관한 짧은 글이다. 주위는 상대적으로 어둠에 둘러싸여 아무것도 안 보이는 상황을 ‘빛의 섬’이라는 아주 멋진 단어로 표현했다. 그런데 ‘그녀’는 주위의 어둠을 ‘검은 바다’로 표현했다. 그러고 보니 이 ‘흰’이라는 소설에서 ‘바다’가 많이 등장한다. 작가의 아버지 한승원씨도 ‘제12회 이상문학상’을 수상한 전업작가이다. 아버지의 소설에도 바다를 배경으로 한 글이 많이 있다고 한다.


한승원 작가는 어느 인터뷰에서 “바다는 ‘우주의 자궁’이다”라고 표현하면서 바다에 관한 글은 무궁무진하다고 고백했다. 그 아버지의 그 딸이라는 생각이 든다.
‘흰’을 전체적으로 보면 한국 뿐 아니라 한국을 떠나 먼 곳에서 쓰여졌다. 작게는 5·18광주 사태에서 크게는 제2차 세계대전까지 그려져 있다. 책을 얇지만 그 폭과 깊이, 길이는 세계를 품고 있다. 세계적으로 뛰어난 대문호들은 대부분 그들의 작품에서 삶과 죽음을 다루는데 저자 한강도 예외는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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