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주는 자가 복이 있도다

한명국 목사의 회상록

한명국 목사
(예사랑교회)

우리는 자연으로부터 하나님께 무진장으로 모든 것을 받았다. 태양은 태양 광선을 우리에게 준다. 땅도 우리에게 결실을 준다. 땅은 줌으로써 상실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인가 더 많이 얻고 더 많이 받아들이는 것이 땅의 법칙이다. 땅이 많이 내지 아니하면 땅은 받을 것이 아무것도 없다. 그러나 땅은 풍성하게 자꾸 내기 때문에 풍성하게 도로 받는 것이다.


모든 동물 세계도 마찬가지이다. 동물들도 자기 새끼를 낳고 씨앗은 뿌려져서 또 씨앗을 심어 풀이 나게 되는 것이다. 식물은 수없이 많은 종자를 낳았다. 이것이 하나님의 창조의 법칙이요 자연법칙이다.
우리는 하나님께로부터 모든 것을 그냥 받았다. 하나님께서는 천지만물을 말씀으로 창조하시고 우리에게 이 모든 세계의 것들을 거저 주시고 사용케 하셨다. “은도 내 것이요 금도 내 것이니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학2:8)고 하셨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해, 달, 별 지구상의 모든 것 공기, 물, 땅, 바다, 무생물, 동물, 식물을 비롯한 모든 생물을 주셨다. 성경은 만인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하나님이 친히 주셨다(행17:25)고 말씀하고 있다.


우리는 하나님의 청지기로서 주신 만물을 사용하고 있다. 하나님만이 친히 가장 많이 주시는 위대한 분이시다. 이 세상에 하나님만큼 우리에게 많이 주신 분은 없다. 부모가 자식에게 아무리 많은 것을 줬다 할지라도 하나님만큼은 줄 수 없다. 하나님은 속성 자체가 거저 주는데 있다. 아무것도 받기를 원치 아니하고 무제한적으로 계속 주는데 있다. 바울 사도께서는 “네게 있는 것 중에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냐?”(고전4:7)라고 반문하셨다.


힐몬산에서 눈이나 비가 물이 되어 내려오면 갈릴리 바다에 모이게 된다. 갈릴리 바다는 분화구로 추축되는 곳이었는데 그 움푹 파인 곳에 물이 고여서 갈릴리 바다, 또는 게네사렛 호수, 디베랴 바다로 불리게 된다. 갈릴리 바다는 이렇게 물을 받아들이고 그 물을 요단강을 통해서 아래 쪽으로 흘려보내기 때문에 이 갈릴리 바다는 살아있는 바다가 되어서 생명체가 살 수 있는 신선한 바다가 되었다. 또 물고기들이 그 곳에 많이 머물고 플랑크톤이 많아서 물고기의 먹이가 되며 이끼 같은 수초도 살아 움직이는 바다가 된 것이다. 그러나 사해는 왜 사해(死海)가 됐는가?


사해가 죽은 바다가 된 것은 요단강 물을 받아들이기만 하고 내어보내지 않기 때문이다. 내어보낼 수가 없게 되어 있다. 사해는 지중해보다 400m나 낮게 되어 있어서 물을 내보낼 수가 없다. 그래서 죽은 바다가 되어 피라미나 고기 한 마리 볼 수 없다. 소금으로 된 소금바다로 사해가 되어버린 것이다. 사해는 결국 물을 받아들이기만 하고 내보내지는 않아 물이 계속 증발하다 보니 소금이 남아 짜게 되어 어떤 생명채도 살 수 없는 죽음의 바다가 된 것이다. 갈릴리 바다는 받아들이는 대로 그만큼 또 내어 보내기 때문에 살아있는 바다가 되었고, 받아만 들이고 내어보내지 않는 사해는 이름 그대로 죽음의 바다가 된 것이다. 받기만하고 주지 않고 베풀 줄 모르는 인생은 사해바다 꼴이 된다.


하나님께서는 가장 크고 위대한 선물을 우리에게 주셨다. 하나님이 주신 것 중 가장 위대한 선물은 바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를 위해 이 세상에 보내주신 것이다. 예수야말로 이 세상에 가자 위대한 선물로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위대한 선물이다. 예수님은 인류에게 자신을 주기 위해 오셨다. 그는 십자가까지 자기 자신을 내어주기 위해 오셨다. 이는 하나님께 드림이요 우리에게 속죄양으로 자기 몸을 주신 것이다. 예수의 일생은 희생과 드림과 베푼 삶이었다.


예수 친구는 온 인류의 죄를 위해서 자기 몸을 십자가에 달려 우리 죄 대신 희생하여 죽으신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마20:28)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주시는 삶을 살았다. 예수님은 그의 속성대로 사랑의 동기에서 주는 삶을 나타내셨다. 하나님의 선물인 예수님은 주기 위해서 세상에 오셨으며 주님의 삶은 전적으로 주는 삶, 하나님께 드리는 삶이었다. 사람을 위한 가장 위대한 선물인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까지 자신을 드리는 삶을 사셨다.


그는 십자가에서 돌아가실 때 옷 한 벌마저 로마병사에 의해 벗겨졌다. 그가 세상에 오신 모습과 똑같이 세상을 떠날 때도 모든 것을 온전히 줬다. 예수님께선 한 번도 자신의 유익을 위해서 기적을 베푸시지 않으셨고 전적 이타주의(利他主義)로 필요한 이웃 사람을 위해서나 인류를 위해서 주려고만 오셨고, 주고 사셨으며 마지막까지 주는 삶을 사셨던 희생과 드림의 십자가의 삶이셨다.


예수님은 드림에 대해 가르치셨다. 예수님은 드림의 중요성과 드리는 일의 위대성을 호평하셨다. 그의 가르침의 핵심은 사랑을 드림으로 표현해 주셨다. 사도행전 20장 35절은 바울 사도가 빌레도에서 에베소 교회의 장로들을 청해놓고 송별의 말씀을 마친 다음 결론으로 하신 말씀으로 “주 예수의 친히 말씀하신 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하심을 기억하여야 할지니라”고 하셨다.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와 하나님이 창조하신 사람에게 거저 주신 이 자연으로부터 축복을 받았고, 예수님으로부터 구속의 은총을 그냥 받았으니 우리도 주님께 드리는 것이 마땅하다. 감사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다. 율법적인 뜻으로 우리가 받았기 때문에 의무적으로 드린다는 생각을 하면 안된다. 우리는 은혜 안에 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이 자연을 주심에 대해서 예수님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신 이 은혜에 대해서 보답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우리가 하나님께 받지 않은 것이 없고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까지 인류 최대의 선물로 받았으니 우리도 감사로 드리는 것이 마땅하다. 우리는 하나님의 청지기로서 자신과 시간, 재능, 물질을 드려서 봉사해야 한다. 과부가 두 렙돈을 성전 연보궤에 넣는 것을 예수님이 보시고는 “자기 모든 소유 곧 생활비 전부를 넣었느니라”(막12:41~44)고 극구 칭찬하셨다. 이 칭찬은 예수님께서 사람들이 하나님께 드린 드림의 칭찬 중 최고의 극찬이었다. 옥합을 깨뜨려 예수님의 장례를 예배했던 향유를 부운 여인에 대해 예수님은 극구 칭찬하셨다. “저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이 복음이 전파되는 속에는 이 여자의 행한 일도 말하여 지를 기념하리라”(마26:10~13)


한 어린 아리가 먹지 않고 주님께 드린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의 기적을 생각할 때 우리는 드림의 법칙이 낳는 기적을 체험한다(요6:9~13). 하이드(A.A. Hide) 성도가 빚더미 속에서 십일조를 계속 드리는 것을 보고 “당신은 빚은 안갚고 십일조만 하면 어떻게 합니까?”라고 물었더니, 하이드 성도는 “하나미의 빚을 먼저 갚아야 내 빚도 갚게 되지 않겠습니까?”라고 대답했다.


하나님의 빚을 갚을 줄 아는 사람에게 하나님께서는 그냥 보고만 계실까? 세월이 흘러 마침내 그는 세계적인 부자가 되었다. 하나님의 축복의 약속은 늘 이뤄지기 마련이다.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안겨 주리라?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도 헤아림을 도로 받을 것이니라”(눅6:3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