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는 기독교인들이 가진 부활신앙 곧 하나님이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셨다는 것을 마음에 믿는 믿음(롬 10:9)이 부활현현의 체험이라는 하나님의 계시의 결과로 주어진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라는 주제에 집중해 거기에 담긴 신학적인 내용을 제시하고 있다.
사도 바울은 부활현현의 체험을 부활의 주님께서 여러 증인들에게 ‘보이신’ 사건으로 제시했다(고전 15:5~8). 그것은 하나님이 부활하신 주님의 존재를 여러 증인들에게 보여주시는 계시의 결과로 인하여 그들에게 ‘보이신’ 것을 나타낸다.
이것은 부활의 주님이라는 초월적인 존재를 사람들에게 ‘보여주시는’ 하나님의 주권적이고 초월적인 계시 행동이 먼저 있었고 그 결과로 사람들은 그 계시를 받아 육안으로는 보이지 않는 초월의 존재를 “보게 되는” 시각적인 신비의 체험을 하게 된 것을 가리킨다. 사도 바울은 그 체험을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갈 1:12) 혹은 “하나님의 계시”(갈 1:15~16)라는 말로 표현했다. 그는 그 체험의 결과로 부활의 주님을 깊이 인정하고 인식하게 됐으며 그 체험을 자기의 사도직의 근본으로 삼았다.
그는 그의 사도직이 의심을 받을 때마다 그 체험의 결과로 갖게 된 복음의 확신과 전도의 사명을 기초하여 자신의 사도직을 변호했다: “내가 자유자가 아니냐 사도가 아니냐 예수 우리 주를 보지 못하였느냐?”(고전 9:1). 그는 예수 그리스도 곧 부활의 주님을 직접 보는 부활현현의 체험을 했으며 그 결과로 복음을 전파하는 사도가 되었다고 변호한 것이다.
사도 바울이 부활의 주님을 직접적으로 만나는 체험이 사도행전에는 더욱 생생하게 또 강조적으로 표현됐다. 사도행전에는 그의 체험에 관한 내용이 세 번 나온다(행 9:1~18; 22:1~16; 26:1~18). 신구약성경에 세 번씩 나오는 단어, 어구, 문장 그리고 사건들은 중요성을 특별히 강조하려는 표현법이다. 누가는 사도행전에서 바리새파 유대인 사울이 부활의 주님을 만나게 된 사건을 세 번이나 제시했다.
그것은 누가가 사울의 체험을 사울 자신에게는 물론 기독교 선교의 역사에서 너무나 중요한 사건으로 인식한 것을 나타내는 강조적인 표현이다. 사도행전에 나오는 사울의 체험에 관한 세 번의 기록에는 약간의 차이점들이 있다. 먼저 양식의 측면에서 사도행전 9장은 저자가 사울이라는 제 삼자의 체험을 제시하는 “3인칭 서술문”의 양식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사도행전 22장과 26장은 사도 바울이 자기 자신의 체험담을 말하는 “1인칭 간증문”의 양식으로 나온다. 다음에 사울에게 주시는 주님의 소명의 말씀이 사도행전 9장과 22장에는 아나니아라는 유대인 기독교인을 통해 전달되는 “간접 소명”의 형태로 나온다. 그러나 사도행전 26장에는 사울이 부활의 주님을 만나는 그 자리에서 부활의 주님으로부터 사울에게 직접 전달되는 “직접 소명”의 형태로 나온다. 여기에 사울의 체험과 소명의 전달에 있어서 해결하기 어려운 역사적 문제의 요소가 있다.
사도행전 9장에 나오는 사울의 체험에는 주님의 계시가 시청각적인 묵시의 형태로 두 가지로 표현된다. 첫째는 사울이 하늘로부터 비취는 빛을 보았다는 것이며 둘째는 주님의 음성을 들었다는 것이다. 여기서 사울이 본 빛의 정체가 불분명하다. 이 빛에 관하여 사도행전 22장에는 “큰 빛”(행 22:6)으로 또 사도행전 26장에는 “해보다 더 밝은 빛”(행 26:13)으로 묘사된다.
‘빛’과 “큰 빛”은 이사야서에서 하나님의 구원 행동을 나타내기 위해 사용되었는데(사 9:1~2), 마태가 그것을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과 관련하여 성취 인용문으로 제시했다(마 4:14~16; cf. 눅 1:79). “해보다 더 밝은 빛”은 바로 이러한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계시의 역사를 강조적으로 나타내는 비유적 표현이다. 사도 바울은 그가 부활의 주님을 만나던 시각을 ‘정오’로 제시했다(행 22:6; 26:13).
이것도 중동 지방에서 하루 중 햇빛이 가장 강렬하게 비취는 시각인 정오에 그 햇빛보다 더 강렬한 계시의 빛이 사울에게 임하여 부활의 주님을 직접 보고 듣고 만났던 그 강력하고 형언하기 어려운 신비의 체험을 나타내고 있다.
사울에게 임한 주님의 계시는 시각적인 요소와 함께 청각적인 요소로 임했다. 그가 빛을 보고 땅에 엎드러져 있는데 주님의 음성이 들려왔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왜 나를 박해하느냐?”(행 9:4). 사울은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고 있었는데, 부활의 주님은 사울이 주님 자신을 박해하고 있다고 말씀하심으로써 제자들과 주님 자신을 동일시하셨다.
사울이 자기에게 말씀하시는 이의 존재를 알지 못했기 때문에 “주여, 당신이 누구십니까”라고 물었는데, 주님의 음성이 다시 들려왔다: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니라. 네가 일어나 성으로 들어가라 행할 것을 네게 이를 자가 있느니라”(행 9:5~6). 사울에게 임한 주님의 계시는 시각적으로 또 청각적으로 전달됐다. 인간은 시각과 청각을 통해 인식하게 된다. 하나님은 초월자이시지만 인격의 존재이기 때문에 인간이 인격적으로 하나님을 체험하고 인식하도록 계시하신다.
하나님의 계시는 초월의 세계로부터 오는 것인데, 이렇게 시청각적 체험을 통해 전달되고 인식되는 것이다. 다만 계시의 체험에서 ‘본다’는 것은 보이지 않는 세계와 존재가 ‘보이는’ 것이며 ‘듣는다’는 것은 청각으로 듣지 못하는 것이 ‘들려오는’ 것이다.
사울은 이 신비하고 충격적인 체험으로 인하여 “눈은 떴으나 아무 것도 보지 못하고 사람의 손에 끌려 다메섹으로 들어가서 사흘 동안 보지 못하고 먹지도 마시지도 않은 채 기도하고 있었다”(행 9:8~12). 그런데 주님께서 아나니아라는 제자를 불러 사울에게 소명을 전달하게 하셨다. 아나니아가 사울이 머물던 집에 들어가서 그에게 안수하며 말했다: “형제 사울아 주 곧 네가 오는 길에서 나타나시던 예수께서 나를 보내어 너로 다시 보게 하시고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신다”(행 9:17).
아나니아는 사울이 만난 부활의 주님을 “네가 오는 길에서 나타나시던 예수”로 소개한다. 여기서 ‘나타나시던’으로 번역된 단어는 사도 바울이 고린도전서 15:5~8에서 부활현현의 체험자 명단을 제시하면서 사용했던 ‘보이셨다’(단순과거 수동태)라는 동사와 같은 동사의 “수동태 분사”로 되어 있다. 이것을 직역하면 “네가 오던 길에서 보이셨던 예수”가 된다. 사울이 체험한 것은 바로 부활하신 예수의 현현(나타나심)이었다는 것이다.
부활의 주님이 아나니아를 사울에게 보낸 목적은 그로 하여금 “다시 보게 하시고 성령의 충만함을 받게 하기” 위함이었다. 아나니아가 사울에게 안수하여 기도했을 때 “즉시 사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벗어져 다시 보게 되었다”(행 9:18). “다시 보다”라는 동사가 이 문맥에서 세 번 나온다(행 9:12, 17, 18). 이 동사는 사울의 체험에 관한 두 번째 증언에서도 두 번 나온다(행 22:13).
이 동사는 보이지 않는 세계와 존재에 대한 체험을 인하여 갖게 되는 인간의 의식세계의 변화를 나타낸다. 누가는 부활의 예수에 대한 사울의 인식의 변화를 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벗어져 다시 보게 되었다”라고 표현했다. “비늘 같은 것”은 사울의 의식세계를 가리고 그로 하여금 부활의 예수를 인식하지 못하게 만들고 있었던 그의 바리새파적 전통을 가리킨다.
그는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었다고 자부했고(빌 3:6), 조상들의 전통에 대하여 더욱 열심을 가졌으며(갈 1:14), 또 바리새파적 율법 전통을 엄격하게 따르면서(행 22:3) 모든 것을 생각하고 판단해왔었다. 그래서 그는 부활의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고 따르는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는 일에 선봉에 섰었으며(고전 15:9) 또 범사에 나사렛 예수의 이름을 대적하여 행동해야 한다고 생각했었다(행 26:9).
그랬던 그가 부활의 예수를 직접 보고 듣고 만나는 계시의 체험을 통해 예수께서 살아계신다는 것을 인정하게 됐으며 지금까지 자기의 생각과 판단이 잘못됐다는 것을 깨닫게 됐다. 삼일 밤낮을 단식하며 기도하던 그에게 부활의 예수를 인정하고 그의 마음에 영접하는 믿음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아나니아의 안수 기도와 함께 지금까지 그의 내면세계를 가리고 있었던 비늘 같은 것이 벗어지면서 부활의 예수가 밝히 보이기 시작했으며 바리새파의 전통을 인하여 극심하게 혼란스러웠던 그의 마음에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확신이 들어오는 것이었다. 부활의 예수를 통해 모든 것을 다시 보는 새로운 눈, 영원한 눈, 신령한 눈이 그에게 활짝 열린 것이다. 부활의 예수께서 그의 마음에 들어오시어 생명의 빛을 주시면서 캄캄한 밤 같았던 그의 의식세계가 광명한 햇빛에 나오는 것 같은 극적인 변화가 일어난 것이다.
김광수 교수 / 침신대 신학과(신약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