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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지역의 덕스러운 복음전도의 기수 이덕여 목사(5)

김대응 목사 예수향기교회
한국침례교회역사연구회 회장

이 감노는 “비록 물질적으로는 놈들에게 빼앗김을 당한다 해도 우리의 신앙정신은 빼앗길 수 없다.”라는 순교의 각오를 가지고 신앙을 지키자고 외쳤다. 그리고 마을 사랑방에서 집안의 안방에서 신도들을 모아 주일을 지켰다. 1945년 8월 조국은 광복을 맞이했다. 해방된 조국은 자유롭게 찬송을 부르고, 자유롭게 교회에서 예배를 드릴 수 있었다. 신앙의 자유를 되찾았을 뿐만 아니라 그동안 무너진 교회를 재건하고자 흩어진 교인들을 모으는데 최선을 다하였다.


원산사건은 다음과 같다.
일제(日帝)는 1941년 12월 7일, 미국의 진주만 공격과 동시에 태평양전쟁을 일으켰다. 이때부터 그들은 교회의 공식집회 때에는 국민의례를 강요하고, 교회 안에서 국기배례, 황궁요배, 출정 장병의 무운장구를 위한 묵념, 황국신민서사를 외워 제창하도록 강요했다. 또한 일제는 이러한 전시 체제에 순응하지 않는 교회의 지도자들과 신도들에 대하여 일제히 검거에 나서 불응자들은 본격적으로 투옥하였고 선교사들은 모두 추방했다.
1942년 6월 10일에 원산의 헌병대는 교단총부를 불시 수색하는 동시에 이종근 감목을 검거 구속했다. 이들은 이 감목에게 동아기독교의 교규(敎規)에 명시된 몇 가지 사항에 대한 심문을 시작했다.


재림시 예수의 지위는 무엇인가? 천년왕국이 건설되면 일본제국(日帝)도 그 통치에 들어가는가? 일본 천황도 믿지 않으면 멸망하는가? 그때는 일본제국도 망하고 천황도 그 통치에 굴복하는가? 국체명징(國體明徵)을 위반하면 불경죄임을 아는가? 단체의 대표인 이 감목의 답변을 간부는 물론 전 교단 지도자들도 동일한 신조로 가르치고 있는가? 이때 동아기독교의 교규(敎規), ‘신약젼서’, ‘복음찬미’를 면밀히 조사 검토했을 뿐만 아니라 교단의 지도자들을 신문하던 일본관헌은 침례교의 재림 신앙과 천년왕국 사상을 고무하는 ‘복음찬미’에는 일제의 신도(神道)와 천황 숭배 사상에 위배되는 불온사상이 많이 내포되어 있다고 조서를 꾸몄다.


이에 따라 이들은 동아기독교의 ‘신약젼서’와 ‘복음찬미’를 모두 압수했을 뿐만 아니라 감리교나 장로교에도 재림 사상과 천년왕국 사상을 고무하고 국체(國體)에 부적합한 ‘찬송가’는 전부 삭제하거나 수정하도록 조치했다. 이러한 심문에 대해 이종근 감목(함남, 원산)이 성서에 기록된 신앙에 입각해 확신에 찬 답변을 하자 다음 날 전치규 안사(함남, 원산)와 김영관 목사(함남, 원산)마저 구속되고, 원산교회에는 집회 금지령을 내리고 총부에 비치된 일체의 서류를 검사국으로 송치했다.


취조 과정에서 혹독한 심문에도 불구하고 세 사람의 답변이 한결같고 죽음을 각오한 순교자의 자세로 임하는 이들의 태도에 놀라움과 분노가 극도에 달한 취조 형사는 ‘법 때문에 너희들을 타살(打殺)하지 못하는 것이 유감이다’라는 극언을 했다. 이들을 3개월간 구속해 취조했으나 그 이상의 혐의를 찾을 수 없게 되자 마침내 일본 관헌은 9월에 전국에 있는 동아기독교의 사역자 전원에 대한 구인장을 발부하고 검거에 나섰다.


원산헌병유치장에 구금된 이들은 순서대로 5일 동안 아침부터 저녁까지 형언할 수 없는 혹독한 고문과 구타로 심문을 받았다. 이들이 당한 심문은 곤봉과 주먹으로 사정없이 때리면서 시작하는 것이 인사였다. 무릎을 꿇게 하고, 곤봉으로 양어깨와 팔뚝을 사정없이 구타해 어깨에서 팔까지 시퍼렇게 검은 멍이 들었으며, 의자를 높이 들게 하여 몇 시간씩 꿇어 앉아 정좌를 취하게 하는 고문은 산다는 것이 죽는 것만 못한 시련이었다. 박병식, 이덕여 감노는 몇 달을 병으로 신음했고 전병무, 이상필 감노는 수염을 깎지 않는다고 무수한 봉변을 당하기도 했다.


이덕여 감노는 1944년 5월 1일에 해당 서류와 함께 함흥형무소로 넘겨졌고, 5월 14일에 옥중 고문으로 인한 지병(持病)을 얻고 석방됐다. 그는 함흥형무소로 갈 때 죄수들이 쓰고 가는 대나무로 만든 용수를 쓰고 가면서 신앙의 지조를 지키기 위해 고난을 당하면서도 성경말씀으로 심정을 토로했다.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거하심이라. 저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오히려 말하느니라”(히11:4)
그분들은 돌아가셨지만 그분들의 믿음의 행보는 아직도 우리에게 말씀하고 계시다.


1945년 8월 15일 해방이 되자 교단 재건을 일으키게 됐고, 교회들은 부흥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1950년 6·25전쟁이 발발함으로 다시금 공산주의자들에게 핍박을 당하게 됐다. 강경교회에서는 이종덕 목사가 신앙을 지키다가 공산당에게 총살당했다. 광시교회의 이덕여 감노도 공산주의자들에 의해 가택 수색을 당하면서 다락에 고이 쌓아뒀던 이덕여 감노가 가지고 있던 모든 성경과 찬송가 책 들을 몰수당했고, 그런 환난 중에 여동생 이한나 집사 댁과 사돈의 집에 잠시 피난해 기사회생하게 됐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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