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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성인교육의 관점에서 본 평신도신학-끝

이석철 교수
침신대 기독교교육학과

특히 우리나라 평신도들은 여러 가지 이유로 인해 자기주도적 성향이 그리 강하지 않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개인과 상황에 따라 페다고지와 안드라고지의 원리를 융통성 있게 조합하여 접근하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4. 평신도의 자기주도적 학습
성경적 교회관에 대한 올바른 이해와 구현은 목회자뿐만 아니라 평신도들에게도 필수적으로 요구되는 것이다. 특히 교회 구성원의 거의 전부를 차지하는 평신도들이 성경적 교회관에 대한 확신을 해야 교회가 올바로 세워져 갈 수 있다. 결국 성경에서 멀어진 잘못된 문제에 대한 근본적인 해결의 시작은 성경적 원리로 되돌아가는 것이다.


실로 평신도신학의 구현을 위한 실천과 행동은 성경적 본질에 대한 올바른 이해와 확신으로부터 나와야 한다. 이 어려운 과제를 위해 평신도들은 자기주도적 노력을 치열하게 해야 할 것이다.
옥한흠을 비롯한 많은 선각자가 평신도를 ‘깨우는’ 노력을 기울여왔지만, 평신도들이 스스로 잠에서 ‘깨어나는’ 노력도 절실히 요구되는 것이다.


특히 성경적 원리를 이해하기 위한 배움의 노력을 적극적으로 해야 한다. 성인교육에서는 학습의 자발성을 하나의 대원칙으로 강조하고 있다. 자기주도적 학습자로서 성인의 역할을 강조하는 이 원리는 평신도 그리스도인들에게 잘 적용될 필요가 있다.
실로 오늘날 평생학습 사회에서 성인들은 의도적 변화를 추구하기 위해 스스로 배움이라는 수단을 적극적으로 활용해야 한다. 이는 평신도 그리스도인들이 성경적 원리와 가치관을 정립하여 성숙한 신자로서 살아가는 데도 동일하게 적용되는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의 평신도교육 상황은 지나치게 목회자 의존적이다. 이렇게 된 것은 사실상 목회자들의 책임이 크다. 목회자들은 “학습자들에게 성서를 이해하고 통찰하기 위해서는 목사나 교사에게 항상 의지해야 한다”고 가르치면서 그들에게 의존심을 길러주는 경향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적 교회관을 비롯해 평신도의 책임과 역할 등에 관한 내용을 평신도들이 직접 배울 수 있는 기회와 자료는 얼마든지 많이 있다.
평신도들은 적극적인 태도를 보이고 자신을 가르치는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목회자가 가르쳐주지 않았다거나 이 주제에 대해 배우는 방법을 몰랐다고 이유를 댈 수는 없는 것이다.


평신도교육은 “철저하게 평신도가 주체가 되어 배우는 학습의 경험이 되어야 할 것”이다. 목회자의 역할이 평신도를 ‘온전하게 하여 봉사의 일을 하게 하는 것’이라면, 평신도의 역할은 온전하게 ‘되고’ 봉사의 일을 ‘하는’ 자신의 노력을 기울이는 것이다. 이러한 자기주도적 학습의 노력을 통해 평신도는 교회 안에서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를 알아야 하며, 목회자와의 관계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해야 한다.


스티븐스는 목회자의 자기 인식이 중요하지만, 평신도의 자기 인식에도 “중대한 전환이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그러한 자기 인식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신분과 위치, 그리고 사명과 책임이라는 관점에서 이뤄져야 할 것이다. 사실 성경의 평신도, 하나님의 ‘라오스’는 ‘교육 수준이 낮고 비전문적인 문외한’을 뜻하는 ‘라이코스’와는 달리, “믿을 수 없을 만큼 큰 찬사”이다. 이 성경적 진리 하나만을 깨달아도 평신도의 자아 정체감은 ‘혁명적으로’ 바뀔 수 있다. 많은 평신도는 자신이 “평신도이기 때문에 교회에서 수동적이며 관망적인 자세를 취하는” 것이 사실인데, 이는 “성도의 의미를 스스로 평가절하하는 것”이다.


이 같은 잘못된 생각과 태도는 성경적 교회의 본질적 의미를 깨닫게 될 때 근본적으로 바로 잡을 수 있기 때문에 평신도의 학습은 문제해결의 열쇠인 것이다. 평신도의 학습은 깨달음에서 머무는 것이 아니라 적용과 실천으로 이어지는 것이어야 한다. 성경적 원리에 근거하여 기존의 교회가 변화돼야 할 것들에 대한 목소리를 내고 실천에 앞장서는 평신도들이 돼야 하는 것이다. 예컨대, “교회의 생활과 가르침과 훈련이 교회 자체보다는 직장과 가정, 사회를 지향한다고 주장해야 한다.” 이런 주장을 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며, 또한 주장하는 대로 곧바로 받아들여지거나 실행되지 않을 수도 있다.


깁스와 모턴은 이러한 행동을 가리켜 교회 안에서 “귀찮은 존재”가 되는 일이라고 표현함으로써 사실상 아무나 하기는 쉽지 않음을 말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평신도의 첫째 의무”라고 말하면서 그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그리고 모든 건설적인 주장과 제안과 질문들은 성경적인 진리에 대한 확신에서 나와야한다고 함으로써 평신도들의 배움의 중요성을 역설했다.


Ⅴ. 나가는 말
‘평신도신학’이란 16세기 유럽의 종교개혁, 특히 만인제사장 사상을 통해 전통 가톨릭교회의 사제주의에 대한 저항에서 출발한 성경적 교회론 회복 운동이라고 할 수 있다.
현대 평신도신학의 형성은 ‘원리 선언’만으로 끝난 종교개혁의 만인제사장 원리를 재천명하고 실천했던 역사적 과정을 거친 것이다. 이는 가톨릭교회와 루터교, 영국국교회, 그리고 세계교회협의회 에큐메니칼 운동에 참여했던 주류 개신교단들의 합작품이라고 말할 수 있다.


문제는, 이미 본 연구에서 언급했듯이, 이들 역시 국가의 기득권 정치 세력의 편에 서서 “또 다른 성직주의”에 빠져들었다는 것이다. 이 불행한 결과에 대해 크래머는 말하기를, 새로이 탄생한 이 진영의 ‘교직자’(교역자)들은 “분명히 여러 모로 보아 예전의 ‘성직자’와 다를 것이 없었다”고 했다.
자유교회 전통에서 제도권교회에 순응하지 않고 ‘분리해 나왔던’ 침례교도들은 사실 이와 같은 역사 속의 평신도신학 운동에 참여하지는 않았다.


다만 평신도신학에서 내세우는 주장들과 근본적으로 입장을 같이 하고 공감하는 공통분모를 가지고 있을 뿐이다. 마치 종교개혁의 주요 교리인 믿음에 의한 구원, 성경의 권위, 만인제사장론이 침례교도들의 전통적 신앙과 일치하는 것과 같다. 아이러니한 것은 종교개혁이나 평신도신학의 주요 교리들이 그것을 애초에 주장했던 진영보다 자유교회 전통에 있는 진영에서 더 잘 정착되고 발전했다는 점이다.


예컨대, 평신도신학의 단초가 됐던 루터의 만인제사장 교리가 오히려 회중주의를 실천하는 “침례교회와 같은 자유교회 전통에 뿌리를 내렸다”는 사실이다. 평신도신학은 침례교회의 입장에서 볼 때 매우 중요한 신학이다. 평신도신학의 핵심은 교회론이고, 침례교회의 특성이라는 것도 주로 교회론으로 이루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침례교회가 비록 역사적으로는 평신도신학 운동과의 연결점이 없더라도 성경적 교회론을 지향해 왔다는 점에서는 신학사상적으로 서로 통하는 것이다.


침례교회가 굳이 평신도신학이라는 이름을 쓰지 않아도 지금까지 지켜온 자랑스러운 성경적 교회론의 유산을 잘 계승하며 실천하면 되는 것이다. 다만 이것이 과거 종교개혁처럼 단지 ‘원리 선언’에 머물러서는 안 될 것이다. 우리 안에 여전히 제도교회나 성직주의 같은 요소가 남아있지는 않은지 자신을 살피며 끊임없는 개혁과 갱신을 도모해야 한다. 그런 요소들을 가지고 있는 ‘큰’ 교단들을 부러워하거나 모방하려고 하지 말고, 성경적 신앙과 행습을 지켜온 자신들의 역사에 자부심을 느껴야 한다. 특히 목회자는 평신도를 가르치는 성인교육자로서의 의식과 역량을 가지고 평신도를 성공적으로 구비해 이 땅에서 하나님의 교회를 바로 세우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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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다시 사셨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그의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벧전 1:3) 2024년 부활절을 맞이하여 3500침례교회와 목회 동역자. 성도들 위에 그리스도의 부활의 생명과 기쁨과 회복의 은총이 충만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우리가 죄인으로 영원한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는 존재에서 예수님의 죽으심과 다시 살아나심으로 영원한 생명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역사적인 순간입니다. 이 부활의 기쁨과 감격이 없다면 우리는 아무것도 아닌 존재입니다. 이 땅의 창조주이신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에 직접 주관하시고 인도하시며 이제는 구원의 완성으로 진정한 하나님 나라의 백성을 몸소 가르치시고 보여주시기 위해 그의 아들을 보내주신 사실을 믿고 기억해야 합니다. 그 분은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셨고 가르치셨으며 가난한 자, 병든 자, 소외된 자, 고난 받는 자를 치유하시고 회복시키셨습니다. 그 회복을 통해 우리는 이 땅에 믿음의 공동체를 세웠습니다. 그 공동체의 핵심은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과 부활의 놀라운 소식입니다. 이 소식이 복음의 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