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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슴 아파만 하지 말자

김근중 목사
늘푸른교회

한 사회를 이루고 있는 구성원은 크게 3세대로 구분되어 있다. 오늘의 사회가 있기까지 과거에 수고하고 땀 흘리는 세대로 ‘공경과 섬김’의 대상인 1세대와 2세대는 지금 우리 사회를 위해 수고하고 애쓰는 세대로 ‘격려와 협조’의 대상이다. 또한 우리 사회의 미래를 위해 책임을 지며 땀 흘릴 제3세대는 ‘투자와 양육’의 대상인 것이다. 바람직한 사회는 이 3세대가 한데 어울려서 서로 공경, 격려와 투자를 아끼지 않으며 함께하는 공동체인 것이다.


우리의 현실은 어떠한가?
계층, 학력, 연령, 이념, 지역별로 나라는 사분오열로 갈가리 찢어져 있다. 사회 통합을 앞장서서 견인해야 할 지도자들은 자신들의 정치적 이득을 따라 오히려 분열과 갈등을 적극적으로 조장하거나 심지어는 즐기고 있다. 그 결과 남북분단보다 남남분열을 더 우려하는 목소리가 비등해져가고 있다. 이런 소용돌이 속에서 교단과 교회는 함께하는 공생(共生)의 몫을 제대로 감당하고 있는가? 불행하게도 그 대답은 “아니요”이다. 크고 작음을 막론하고 반목과 대립 분열의 내홍을 겪지 않는 교회와 교단이 드물다. “서로 사랑하라”는 새 계명을 부여받은 교회 내에서조차 함께하는 삶을 이루어가지 못한다면 교회 밖에서 공생을 구현한다는 것은 요원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저마다 함께하는 공생의 필요성을 역설하면서도 실제로는 이루지 못하는 이유는 두 가지로 생각할 수 있다. 첫째는 사람마다 공생의 필요성을 절감하면서도 실제로 공생의 본질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기 때문이며, 둘째는 공생의 대전제가 홀로 서는 삶인 자립(自立)임을 모르기 때문이다. 그 결과 공생의 필요성을 역설하면서도 공생에 실패하는 주된 이유가 되고 있다. 성경은 일관되게 우리에게 함께하는 공생의 삶의 대전제가 홀로서는 자립임을 가르치고 있다.


“레위기19:9~10”에서 시혜자(施惠者)와 수혜자(受惠者)의 법칙을 제시한다. 밭주인은 추수할 때 모퉁이나 떨어질 곡물은 그대로 둬야 한다. 이것은 가난한 자들이나 타국인을 위한 것이었다. 만일, 이렇게 한다면 더 효율적이지 않을까? 모퉁이와 바닥에 떨어진 곡물의 전체 수확량의 몇%가 되는지를 정확히 계산한 뒤, 전체를 거두고 창고에 쌓아뒀다가 가난한 자들이 올 때마다 창고에서 꺼내준다면, 훨씬 위생적이면서도 인간적이지 않겠는가?


그런데 밭에 그냥 두라는 것이다. 그 이유는 만약 주인이 자기 창고에 거둬들이면 그는 가난한 자들에게 마치 자기 것을 인심 쓰듯 나눠 줄 것이며, 더욱 문제가 되는 것은 자기 맘에 드는 사람에게만 주려 할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동시에 수혜자가 지켜야 할 법칙을 주셨다. 수혜자는 언제라도 포도원이나 밭에 들어가 배불리 먹을 수는 있지만 그릇에 담거나 낫으로 잘라 올 수는 없었다(신23:24~25). 한 번에 일주일, 한 달씩 양식을 가져올 수 있다면 분명 거지 근성을 가진 노숙자로 살아갈 것이기 때문이다.


거지의 땅이 아니다.
이스라엘은 40년 광야 생활을 마치고 요단강을 건너서 마침내 가나안 땅에 들어갔다.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아무 수고도 없이 하늘에서 주시는 만나와 메추라기를 먹으며 살았다면, 약속의 땅 가나안은 하늘에서 매일매일 진수성찬이 떨어져야 마땅하지 않았을까? 그러나 이스라엘이 그 땅에 들어감과 동시에 만나와 메추라기는 멈추었다. 그 때부터 그들은 땀 흘리고, 수고하면서 곡식을 거두어야 했던 것이다. 약속의 땅은 일하지 않고 먹는 거지의 땅이 아니었다. 스스로 먹을 것을 위해 일하지 않으면 안 되는 자립의 땅이었다. 성경은 일관되게 자립을 요구한다. 왜냐하면 자립은 공생의 대전제이기 때문이다. “자립하지 않으면 공생할 수 없다.” 공생은커녕 누구에게 기생할 수밖에 없으며, 함께하는  공생의 가장 큰 장애물이 되고 만다.


마틴 루터 킹 목사는 달랐다.
그의 주장은 흑백공생이었다. 흑인 민권 운동에 나선 흑인은 마틴 루터킹 목사만은 아니었다. “말콤엑스”와 같은 많은 흑인 지도자들이 있었지만 마틴 루터킹 목사의 영향력이 가장 컸던 것은 그의 주장은 “흑백공생”이었기 때문이었다. 다른 흑인 지도자들의 민권 운동은 대부분의 동기가 백인에 대한 증오와 보복이었다. 자신들이 오랫동안 백인의 압제를 당한 만큼 궁극적인 목표는 흑백평등이 아닌 흑인 우월사회였다.
그 결과 그들의 흑인운동은 과격양상을 띨 수밖에 없었다. 악순환의 연속이었다. 그러나 마틴 루터 킹은 달랐다. 흑백차별타파는 단순히 흑인만의 승리가 아니라 인간에 대한 편견과 증오심에 갇혀있는 백인들의 승리임을 호소했다. 


이런 흑백공생은 백인들의 양심을 움직였고, 그가 믿었던 대로 흑인의 자식과 백인의 자식들이 법적, 제도적으로 평등한 사회에서 함께하는 공생의 새로운 역사의 시작이 된 것이다.
우리 사회와 교회와 교단의 분열됨을 가슴 아파만 하지 말자. 남의 탓도 하지 말자. 우리 중심에 스스로 홀로서는 자립과 함께하는 공생의 돌판을 가슴에 새겨 넣어라.
우리는 총 한 자루 없어도, 권력이 없어도, 역사의 지평을 새롭게 하는 하늘의 사람으로 기록될 것이다. 함께하는 재미와 의미 있는 세상을 만들어 보자.  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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