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분발(奮發)

이정일 목사
청하교회

최근 들어 매일 순간순간 습관처럼 읊조리듯 묵상하는 말씀이 요엘서 2장28절 말씀인데 이 말씀이 왜 나를 이렇게 매료시키는가? “너희 늙은이는 꿈을 꾸며, 너희 젊은이들은 이상을 볼 것이며”라는 이 짧은 두 문장은 내 가슴을 뛰게 한다. 늙은이들이 꿈을 꾸며 살아가는 세상, 젊은이들이 이상을 바라보는 세상에서 산다는 것은 신나는 세상이 아닐까?


하지만 우리는 최근 우리네 삶들을 돌아보면 너무 많은 자조적인 말들이 우리를 지배하고 있다. 그것은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늙은이와 젊은이들의 꿈과 비전을 억압하는 용어들이다. 이런 말이 있다. “당신 참 젊어 보인다 라고 말을 듣는 순간 당신은 이미 늙은 것을 기억하라.”고 했지만 늙은이가 되는 기준이 머리털의 희고 검음의 차이인가?


하지만 그 기준은 꿈을 꾸지 못하고 “과거만 회상하면서” 사는 사람들이 늙은이가 아닐까? 생각해 본다. 그리고 젊은이들이 이상을 잃어버린 순간 그들은 이미 정상적 젊은이라고 하기 매우 어려울 것이다. 이런 현상들이 우연히 생겨난 것이 아니라 지금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병리적 현상이다. 이 현상에 그리스도인들이 무비판적으로 무임승차하고 있지 않은지 묻고 싶다.


늙은이를 꿈꾸지 못하게 하고 젊은이들이 이상을 가지지 못하게 하는 현상의 가장 심각한 문제가 프레임 덮어씌우기다. 나이든 선배들이 후배들에게 해주는 말들이 귀에 걸리게 되면 그 말의 진위와 관계없이 가차 없이 나이가 드시니 ‘꼰대’가 되어간다고 비꼰다.


현대 젊은이들의 주장은 비속어로 쓰이는 ‘꼰대’보다 더 ‘꼰대’스럽다. 이것은 비속어이기전에 프레임 덮어씌우기다. 우리 사회가 젊은이들에게는 우리가 사는 현실을 ‘헬(Hell)조선’이라는 프레임으로 비전을 바라봐야 할 젊은이들의 이상을 꺾어버린다. 오랜만에 어린 손자 손녀들이 보고 싶어 서울 나들이를 갔다가 즐거운 봉변을 당했다. 유치원을 다니는 손녀가 할아버지에게 최근에 배운 노래를 들려주겠다고 해서 불러보라고 했더니 노래제목이 “한국을 빛낸 100명의 위인”이라는 노래였다. 이 노래는 이전에 여러 차례 들었지만 노래 가사에 공감이 가지 않아서 관심을 가지지 않았지만 손녀가 자랑스럽게 부르니 따라 부르기는 했지만 가사가 자꾸 틀린다.


그러자 손녀가 노래가사가 적힌 책을 가지고 와서 볼펜으로 한자 한자 짚어가면서 따라 부르라고 하는데 가뜩이나 근시에 노안까지 겹쳐 손녀가 고사리 같은 작은 손으로 글씨를 짚어주는 데도 가사를 놓치고 머뭇머뭇하는 순간 손녀가 놀라운 사실을 발견한 것처럼 “어, 할아버지 문자를 모르시네!” 하면서 후닥닥 뛰어 들어가더니 백지를 몇 장 가지고 나와서 그림 그리듯 한 글자를 열심히 적어놓고 한 글자 한 글자를 따라 읽으라고 한다.


그래서 “할아버지가 문자를 모르는 것이 아니라 눈이 침침해서 글씨가 잘 안보여”라고 설명해 주는데도 이 귀여운 꼬마 아가씨는 할아버지가 노안이 왔다는 설명이 무슨 말인지 영 이해가 안 되는지 “할아버지는 지금 문자를 모르잖아?”라고 할아버지가 문자를 모른다는 막무가내 프레임을 씌워버린다. 아 이것이 ‘손녀와 소통의 한계구나’라며 다음에 올 때는 이 곡의 가사를 몽땅 외워와야지 다짐할 수밖에 도리가 없었다.


우리 또한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는 가운데 오직 상대를 프레임에 가둬버리는 우를 범하며 살고 있지 않은지 살펴봐야 하겠다. 그러나 우리가 아무리 부정한다고 할지라도 우리는 프레임의 바다 가운데서 유영하며 살아가고 있다. 이러한 현실을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꿈을 꾸며 이상을 바라볼 수 있는 진리가 인도하는 세상을 살아갈 수 있는 힘은 분발(奮發)이 아닐까?


분발(奮發)이라는 국어 사전적 의미는 “가라앉았던 마음과 힘을 돋우어 일으킴”이라는 뜻이다. 지금 우리 사회는 그 사람이 어떤 진취적 사고를 가지고 있는지 묻지 않는다. 오로지 저 사람의 나이가 몇 살인가? 이마에 주름이 얼마나 파였나 그것만으로 그 사람이 무엇을 생각할 것이다. 미리 예단하고 결론을 내려버린다.


최근 우리에게 인생은 꼭 나이로 평가할 수 없다는 사실을 삶을 통해 증명하고 계신 분이 김형석 선생이 아닌가 생각해 본다. 김 선생님께서 “100년을 살아보니 선생의 인생에서 최고의 황금기는 70대였다.”라고 하셨다. 아무리 우리 현실이 끈질기게 프레임선점으로 사람들의 꿈을 꺾고 비전을 바라보지 못하게 할지라도 모든 계층마다 분발의 정신이 필요하다고 믿는다.


무비판적으로 프레임에 동조하는 사고(思考)는 우리 사회가 어떤 경우에도 놓아서 안 될 꿈을 꾸는 노인, 비전을 바라보는 젊은이들의 이상을 꺾는 일일 뿐이다. 성경은 절대 진리이다. 성경이 말한 꿈과 비전 또한 진리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은 이 진리를 최후까지 지켜야 할 의무를 가진 사람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지켜야할 방어선에서 급속도로 와해되어 가고 있다.


 이 문제를 인식하고 우리 사회 전반에 팽배해 있는 프레임전쟁의 장막을 걷어내고 노인이 꿈을 꾸는 세상, 젊은이들이 비전을 바라보는 세상을 만들어야 할 그리스도인들이 마치 물고기가 자기가 물속에서 사는 줄 모르듯이 세상이 만든 프레임 속에서 무비판적으로 수용하며 상대에게 상처를 입히는지 우리는 다시 한번 우리 영혼을 분발시켜야 할 것이다.


우리 마음과 영혼의 분발을 위해 그리스도인들은 진리로 돌아가자.  “그 후에 내가 내 영을 만민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 자녀들이 장래 일을 말할 것이며 너희 늙은이는 꿈을 꾸며 너희 젊은이는 이 상을 볼 것이며” 꿈을 꾸며 이상을 바라보는 이런 신나는 세상을 누가 만들 수 있을 것인가?
“참으로 가벼운 세상 속에서” 자기 영혼과 마음을 분발시키는 그리스도인들만이 그 해답과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