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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성서에 나타난 신학 산책

요한의 ‘독생자’ 기독론(4)

김광수 신학과 특임교수
침신대

필자는 요한복음에서 하나님의 아들 칭호가 나오는 구절들을 중심으로 요한의 기독론 중에서 하나님의 아들 기독론을 살펴보고 있다.


요한복음에서도 하나님의 아들 칭호는 예수 그리스도의 존재를 표현하는 가장 중심적 칭호인 동시에, 요한의 구원론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에게 주시는 구원의 통로와도 직결된 것으로 제시된다(요20:31). 하나님의 아들 칭호는 나사로 부활 사건에서 두 번 나오는데, 먼저 이 사건의 목적을 알려주는 예수님 자신의 말씀으로(요11:4) 또한 다른 하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존재에 관한 여성 제자 마르다의 고백에 나온다(요11:27).


예수님은 나사로의 병듦에 관한 소식을 들으시고는 이틀을 더 머무르신 후에 나사로가 죽은 지 나흘이 지난 후에 나사로의 장례 현장에 가셨다. 요한은 나사로 이야기에서도 다른 사건들의 묘사에서와 마찬가지로 예수님과 등장인물 사이의 대화를 통해 중요한 교훈을 전달한다. 이 사건의 중심적 국면의 묘사에서도 먼저 예수님과 마르다의 대화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존재와 사역의 핵심적 국면이 제시된다.


예수님은 마지막 날 부활을 기대하는 마르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생명은 마지막 날 부활에만 역사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서부터 그를 믿는 신자들의 삶 속에서 강력하게 역사하는 것임을 말씀하신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요11:25~26).“나는 이다”라는 어구는 요한복음에서 하나님의 독생자인 예수 그리스도의 특별한 존재를 나타내기 위하여 독특하게 사용된다.


 ‘부활’이란 단어는 요한복음에서 종말론적 의미로만 사용되고(요5:28; 11:24) 또 그것의 동족어인 “다시 살아나다”라는 동사 역시 대부분 종말론적 의미로 사용된다(요6:39~40, 44, 54). 그리스도의 부활과 관련해 이 동사는 한 번만 사용된다(요20:9). ‘생명’은 예수 그리스도의 존재 자체는 물론 독생자를 통한 하나님의 구원을 표현하기 위하여 이미 자주 사용됐다. 여기서 부활과 생명의 연결은 단순한 중복이 아니다.


먼저 언급된 부활이 예수 그리스도 자신의 부활을 포함해 그 분의 특별한 존재를 강조하는 반면, 다음에 언급되는 생명은 그 분의 존재가 모든 신자들에게 주는 의미 특히 이 표적이 그들에게 제공하는 의미를 표현한다. 따라서 생명을 추가로 말한 것은 어떤 새로운 의미를 말하려는 것이 아니라, 부활이란 말로 앞에서 언급된 것을 명료하게 밝힌다. 예수의 존재에 관한 선언은 그 존재와 믿음으로 연결된 사람들의 존재에 관하여 ‘죽다’와 ‘살다’라는 동사들이 주의 깊게 연결된 두 개의 병행구로 이어진다. 각 구절은 세상의 존재로부터 출발하여 영원한 존재로 나아간다.


첫째 구절에서 ‘죽어도’는 세상에서의 신체적 죽음을 가리키는 반면, 그 신체적 죽음은 신자들이 받게 될 영원한 생명으로 극복된다. 또 둘째 구절에서 ‘살아서’는 세상에서의 신체적 삶을 가리키는 반면, 그 신체적 삶은 믿음을 통하여 영원히 죽지 않는 영원한 삶으로 연결된다. 이 영원한 생명을 가능하게 하는 핵심적 조건으로서 믿음의 중요성이 “나를 믿는 자는”이라는 두 번의 분사 구문을 통하여 강조된다. 예수의 말씀은 인간의 자연적 삶과 영원한 삶을 대조시키는 동시에 그것들을 연결시킨다. 자연적 삶의 종국인 신체적 죽음의 장벽과 제한이 믿음을 통하여 극복되고 또 세상에서의 신체적 삶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영원한 차원의 삶으로 연결된다.


예수의 말씀은 박해와 죽음의 위협에 직면하고 있었던 신자들의 상황에서 죽음의 공포와 두려움을 극복하는 강력한 교훈을 전달한다. 예수는 그의 제자들이 직면하게 될 박해와 죽음의 위협을 예고한다: “내가 너희더러 종이 주인보다 더 크지 못하다 한 말을 기억하라 사람들이 나를 핍박하였은즉 너희도 핍박할 터이요”(요15:20); “사람들이 너희를 출회할 뿐 아니라, 때가 이르면 무릇 너희를 죽이는 자가 생각하기를 이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예라 하리라”(요16:2). 제자들이 느끼는 죽음의 위협은 이미 도마의 말을 통하여 표현됐다(요11:16).


적대적이고 불신의 세상에서 제자직의 대가는 박해와 죽음을 포함하게 될 것이다. 예수의 말씀은 죽음의 장벽과 제한을 넘어서는 영원한 생명의 가능성을 열어놓는다. 예수 그리스도는 단순히 “그 마지막 날”에 죽은 자를 살리는 구원자가 아니라, 지금 여기서부터 믿는 사람에게 영생을 주시는 생명의 수여자이다.
예수님은 마르다에게 “네가 이것을 믿느냐?”는 질문을 통해 그리스도인들이 마땅히 가져야 할 믿음의 내용을 명백하게 제시한다.


이 말씀은 요한복음에서 ‘믿는다’는 동사의 내용(목적어)을 명백하게 제시한 유일한 경우다. ‘믿는다’는 동사는 대개 그 믿음의 대상인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전치사구와 함께 사용된다. 그러나 여기서는 중성 대명사 ‘이것을’을 통하여 신앙 고백 자체가 믿음의 대상이 된다. 믿음은 그 내용을 가지는데, 그 내용은 예수 그리스도가 신자들에게 의미하는 것이며, 따라서 믿음의 내용은 근본적으로 믿음의 대상에 첨부되어 있다. 믿음의 유용성은 어떤 초월적 능력을 경험하는데 있는 것보다 먼저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을 낳게 하고 그것을 통하여 생명의 선물을 받게 하는데 있다.


마르다는 예수의 질문에 대하여 그녀가 갖고 있는 신앙 고백의 내용을 언급한다:  “가로되 주여 그러하외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나이다”(요11:27).
“주여 그러하외다”라는 대답을 통하여 마르다가 예수의 말씀의 의미를 충분히 이해한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그 말씀을 수용하는데, 그것은 마치 시몬 베드로가 생명의 떡에 관한 예수의 어려운 말씀을 수용한 것과 같다(요6:68). 마르다의 태도는 위기 상황의 공동체에게 믿음의 모범을 제공한다. 신자들은 현실에서 부닥치는 문제나 어려움에 대하여 충분히 다 알지 못한다 하더라도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믿으며 그에게서 하나님의 도움을 기대한다.


이어지는 마르다의 고백은 공관복음서에 나오는 베드로의 고백과 같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 고백이다. 저자는 “내가 믿나이다”라는 강조적인 어구 사용을 통하여 이 말의 신앙 고백적 성격을 강조한다. 저자가 특징적으로 사용한 ‘믿는다’의 완료시제(“내가 믿었으며 그래서 지금도 믿고 있다”) 역시 원시 신앙 고백으로 보이는 것을 소개한다. 그래서 어떤 학자는 이 구절을 침례시의 고백으로 간주한다. 마태복음에서는 동일한 칭호들이 사용된 고백이 베드로의 입으로 전달된다(마16:16). 마르다의 고백은 초대 교회에서 예수의 존재를 부르기 위하여 가장 널리 사용되던 기독론적 칭호들로 구성된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특별한 일 곧 종말론적 구원 사역을 위해 보냄을 받은 “기름부음을 받은 자” 혹은 ‘구원자’로서의 직함을 말한다. “하나님의 아들”은 하나님과 특별한 관계를 가진 존재 곧 하나님의 권능을 받아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구원을 실행하는 존재를 가리킨다. 두 칭호들은 여기서 상호보완적 의미로 사용된다. 그리스도가 구약성서에 제시된 유대인들의 기대들의 성취를 나타내는 반면, 예수의 메시아되심은 그가 가진 하나님과의 특별하고 유일한 관계에 의하여 유대교의 모든 기대들을 능가하는 존재를 나타낸다.


“세상에 오시는 자”는 저자가 독특하게 사용한 칭호이다. 이 구절은 앞의 두 칭호들을 수식하는 것일 수도 있고 혹은 앞의 칭호들과 연결된 제 삼의 칭호일 수도 있다. 이것과 동일한 구절이 예수의 권능으로 떡을 먹은 무리가 예수의 존재를 표현하기 위하여 사용한 칭호에서도 사용된다: “그 사람들이 예수의 행하신 이 표적을 보고 말하되 이는 참으로 세상에 오실 그 선지자라 하더라”(요6:14). 거기서도 그것은 표적을 믿음으로 해석하기 위하여 고안된 저자의 의도적 표현이었다. 저자는 마르다의 고백을 통해 하나님의 보냄을 받아 세상에 와서 생명을 수여하는 하나님의 계시자로서의 예수의 존재를 특징적으로 표현한다.


예수님이 여성 제자인 마르다와 길게 대화하며 그 가운데서 예수가 자기의 근본적 존재를 나타내며 또 마르다가 예수의 존재에 관해 고백한 것은 요한복음서 저자가 여인들과 제자직에 관하여 가지는 독특성을 제시한다. 이 대화는 공관복음서들에서 예수와 베드로 사이의 대화와 베드로의 고백에 상응한다. 거기서는 수제자격인 베드로가 예수의 존재에 관하여 그들이 믿는 신앙을 고백한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마16:16). 베드로의 고백은 초대 교회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겨지는 사도적 신앙 고백이었다.


 따라서, 비록 마르다가 그녀의 고백에 관해 아직 충분한 이해에 이르지 못했다 하더라도, 저자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그녀가 베드로와 같은 사도적 신앙 고백의 당사자가 됐다는 사실이다. 요한복음에서 베드로는 열 둘 중의 하나로서 이미 고백의 기회를 가졌다(요6:69). 이제는 여성 제자인 마르다가 동등하게 그 역할을 감당한 것이다. 요한복음서 저자는 이것을 통하여 여성도 남성과 동등하게 사도적 신앙을 고백할 수 있고 또 한 사람의 제자로서 남성과 동등하게 주님의 일에 헌신할 수 있다는 평등적 교회관을 제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