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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성서에 나타난 신학 산책

요한의 ‘독생자’ 기독론(5)

김광수 특임교수
침신대 신학과

요한은 하나님의 아들 칭호를 그의 복음서 저술 목적에 관한 진술에서 마지막으로 사용한다. 요한은 그의 복음서에서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에 관한 요약적 진술을 두 번 제시한다. 첫 번째 요약적 진술은 예수가 행한 “많은 표적들”을 지적하면서 시작하고 왜 많은 사람들이 믿지 않았는가를 설명하기 위하여 이사야서의 구절들을 사용했다(요12;37~43).


두 번째 요약적 진술은 예수가 행한 “다른 표적들”을 언급하고 이 복음서를 기록한 목적을 믿는 것과 관계시킨다. 두 진술들은 이미 언급된 것들을 요약하고 다음에 언급될 것들을 소개한다. 이 구절들은 예수에 대한 제자들의 헌신의 결과들 곧 박해의 두려움을 극복하고 그들에게 주어진 사명을 감당하기 위하여 나아가는 신앙공동체의 미래를 내다 본다.
요한은 먼저 예수가 행한 표적들에 관하여 언급한다: “예수께서 제자들 앞에서 이 책에 기록되지 아니한 다른 표적도 많이 행하셨으나”(20:30). 요한은 예수의 공생애 사역을 한 마디로 요약하여 ‘표적’으로 지칭한다. 요한이 표적 자료를 의지했다고 믿는 학자들은 이 구절들이 그 자료의 결론으로 제시된 것이라고 간주한다.


“다른 표적들”이라는 어구를 통하여 요한이 공관복음서 전승들과 그 밖의 다른 전승들을 생각했을 수 있다. “그의 제자들 앞에서”는 예수의 표적들의 공개적 성격과 함께 그 표적들의 증인으로서 예수의 제자들의 역할을 가리킨다. 요한은 지금까지 표적들에 대한 증인으로서의 제자들의 역할에 관심을 기울였다(cf. 6:6, 8; 9:3~5; 11:7~16).
요한은 “이렇게도 많은 표적들”의 견지에서 예수의 공생애를 요약한 것과 같이(12:37), 그는 그의 독자들로 하여금 믿음에 이르도록 예수가 그의 제자들 앞에서 행한 많은 표적들을 언급한다.


요한에게 있어서, ‘표적’은 이중적 국면을 갖는다: (1) 불신과 관계되는 부정적 국면; (2) 그것으로부터 참되고 온전한 믿음에 이를 수 있는 긍정적 국면. 첫 번째 요약문에서 표적들은 예수의 공생애에서 행한 것에 국한되지만, 여기서 표적들은 올려지신 예수의 현현과 그것의 심층적 의미들을 포함한다. 저자는 또 표적을 제시함에 있어서 선별의 원칙을 언급한다. 그는 많은 자료들 중에서 오직 그의 목적에 필요한 것들을 기록했으며 다른 것들을 생략했다.


요한은 예수님이 행하신 표적을 중심으로 제시된 이 복음서의 기록 목적을 분명하게 제시한다: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의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20:31). 저자는 앞 절에서 이 책에 기록되지 않은 많은 다른 표적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책에 기록된 것의 선별성을 강조한다. 이 책에 기록된 ‘이것들’의 의미를 두 가지로 생각할 수 있다.


첫째, 이 구절을 표적 자료의 결론으로 보고 앞 절에서 언급된 “많은 다른 표적들”과 관련하여 이 복음서에 기록된 일곱 개의 표적들을 가리킬 수 있다. 그것들은 예수의 존재와 그의 사역의 본질을 나타내는 상징적 사건들로서 독자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믿음을 불러일으키고 그 믿음을 통해 생명을 얻게 만드는 통로로 사용된다.


둘째, 이 구절을 이 복음서 전체의 저술 목적으로 간주한다면, 그것은 표적들과 함께 이 복음서에 기록된 예수의 사역 전체를 가리킨다. 그러면 예수의 존재와 사역 전체 곧 그의 화육과 공생애, 십자가와 부활 그리고 올리어지심과 현현 이 모든 것들이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믿음을 제공하고 그 믿음을 통해 생명을 얻는 통로가 된다. 이 구절을 여기에 배열한 저자의 입장에서는 저자는 예수의 사역 전체가 복음이며 그래서 독자들로 하여금 그 복음을 통하여 믿음과 생명에 이르도록 초청한다.


이것들이 기록된 목적의 핵심은 “믿게 하려는 데” 있다. 사본에 따라, “믿게 하려 한다”는 동사의 시제가 부정과거와 현재 두 가지로 나온다. 부정과거인 경우에는, 믿지 않던 사람들로 하여금 “지금 믿게 하려 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곧 전도의 목적을 가리킨다. 그러나 현재인 경우에는, 믿고 있은 사람들로 하여금 “더 견고한 믿음과 더 성숙한 믿음에 이르게 하려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교육과 훈련의 목적을 가리킨다. 저자의 상황을 고려할 때, 이 복음서는 일차적으로 신앙공동체를 위해 곧 이미 신자가 된 사람들을 격려하고 가르치며 굳건하게 하려는 목적으로 저술되었다고 볼 수 있다. 저자는 믿음을 가진 독자들이 예수 안에서 생명을 풍성하게 누리기를 기대하고 있다. 그러나 저자는 다른 한편에서 신앙공동체가 불신의 세상을 향하여 감당하고 있는 전도의 사명을 돕기 위하여 저술했다고 볼 수도 있다.
저자는 불신의 이유들을 명료하게 설명하고 신앙에 있어서의 다양한 오해와 단계들을 찾아낸다.


어떤 목적이든지 간에, 그 믿음의 중심적 내용은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시라는 것이다. 원문에는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의 순서로 나온다. 요한복음서의 예수는 그리스도라는 단어를 직접적으로는 전혀 사용하지 않았고 저자도 이 복음서 전체적으로 그 단어를 매우 드물게 사용한다. 그런데 여기서 저자는 예수의 그리스도 되심을 앞세운다. 저자는 마르다의 고백에서도 그리스도를 앞세웠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나이다.” 이것은 저자의 상황과 입장을 통해 설명될 수 있다. 요한공동체는 동시대 유대교와 대립 관계에 있었으며 그들을 향하여 예수의 그리스도 되심을 증언하려고 노력했다.


저자는 또 다른 계열의 기독교 신자들이 고백하고 있는 신앙고백과 보조를 맞추기를 원했던 것으로 보인다. 예수의 그리스도 되심은 공관복음서 전승을 따른 원시 기독교 고백을 반영한다. 요한에게 있어서, 예수는 하나님의 예언과 약속을 따라 하나님의 특별한 사역을 위하여 택함을 받고 보냄을 받은 자 곧 그리스도(메시아)이다.


하나님의 아들은 하나님과의 관계에 기초하여 예수의 존재를 추가로 설명한다. 하나님의 아들은 하나님과 특별한 관계를 가진 사람이나 존재를 가리키기 위하여 사용된 칭호이다. 이 복음서에서 하나님의 아들이란 칭호가 드물게 사용된다(cf. 10:34~36). “하나님의 아들” 칭호보다는 ‘하나님의’라는 수식어가 없이 ‘아들’이 단독으로 사용된 “그 아들”과 “사람의 아들”이 예수의 자기 계시의 칭호로 익숙하게 사용된다. 그러나 요한은 이 복음서 전체를 통하여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진리를 전달하려고 노력한다. 요한은 특히 예수가 하나님의 유일하고 참된 아들이라는 점에서 ‘독생자’라는 용어를 사용하기도 했다. 독생자는 예수의 선재와 화육 그리고 올리어지심의 모든 기독론적 요소들을 포함하는 독특한 칭호이다.


이렇게 예수를 그리스도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로 믿게 하는 목적은 생명을 얻게 하려는 데 있다. 예수를 믿는 믿음은 하나님의 생명이 전달되는 유일한 통로다. 생명이란 단어는 요한복음서에서 예수의 공생애 사역의 목적과 관련하여 가장 중요하게 사용됐다. 이 생명은 하나님의 생명이며 화육하신 예수의 생명이다. 이 생명으로부터 사람들에게 빛이 제공되고 이 빛은 사람들을 진리와 평화와 자유로 인도한다.


예수는 이 생명을 한 마디로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된 삶으로 정의한다(17:3). 이 생명을 주는 것이 하나님이 그의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목적이며 따라서 예수께서 세상에 오신 목적이기도 하다. 그래서 저자는 이 복음서 전체를 통하여 예수 사역의 목적을 이 생명과 관계시킨다. 고별 강화에서 이 생명의 가장 중요한 요소는 평화와 기쁨과 사랑으로 제시된다. 예수께서 세상에 오신 목적은 바로 신자들로 하여금 이 생명을 얻고 그 생명을 풍성히 누리게 하려는 것이다. 요한은 이러한 예수의 화육의 목적을 따라 자기의 저술의 목적도 예수가 세상에 온 목적에서 찾는다.


이 구절에서 마지막으로 고려할 것은 “그의 이름을 힘입어”라는 어구이다. 예수의 생명은 그의 이름을 힘입어 주어진다. 여기서 이름은 그것이 가리키는 존재 자체 혹은 존재 전체를 가리킨다. ‘예수’라는 이름은 그리스도이며 하나님의 아들인 그 분의 존재 자체 혹은 그의 존재 전체를 나타낸다. 그의 이름은 선재와 화육과 승귀로 나타난 예수 그리스도라는 존재를 가리킨다. 따라서 그의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는다는 것은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와 연합됨을 통하여 그가 주시려는 생명이 주어진다는 것이다.


신약성서에서 예수의 이름의 중요성은 여러 곳에서 제시됐다.
바울은 하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예수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셨으며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 앞에 꿇게 하셨다고 말한다(빌2:9~10).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시고 하나님의 영광에 올리어지신 예수는 이제 모든 존재(보이는 존재는 물론 보이지 않는 존재)와 구별되는 특별한 지위의 존재 곧 하나님과 동일한 본질의 존재가 되셨다(골1:15~18). 바울은 또 주 예수의 함께하심을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함께한다고 표현했다(고전5:4; 6:11).


누가는 예수의 이름의 절대적인 중요성에 관하여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다”고 말한다(행4:12). 이것은 우리에게 구원을 주시는 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라는 의미를 전달한다. 이러한 구절들은 공통적으로 이름이 갖는 중요성을 전달한다. 이렇게 영원한 생명은 보혜사를 통하여 믿는 사람들 안에 임재하시며 활동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힘입어 제공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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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 땅에 평화의 주님이 오셨습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누가복음 2:11) 주님의 은혜가 우리 모든 침례교 가족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기도합니다. 우리가 영원한 생명과 안식을 누릴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독생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보내주심으로 이뤄진 놀라운 역사입니다. 특히 영원한 심판의 자리에 설 수밖에 없는 우리를 위해 그 분은 희망의 메시지, 회복의 메시지, 구원의 메시지를 선포하셨습니다. 그 분이 바로 우리를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이 감격의 순간을, 복됨의 순간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진정한 이 땅의 왕으로 오신 분은 가장 낮고 천한 자리에 오셨지만 온 인류의 구원자로 오신 것을 믿음으로 고백하며 나아가기를 원합니다. 2023년 바쁘고 어려운 한 해를 주님의 인도하심으로 보내고 이제 한 해를 마무리하는 가운데 있습니다. 모두가 참으로 많이 수고하셨고 애쓰셨습니다. 이 모든 것이 은혜이고 감사임을 고백합니다. 지난 시간 동안 침례교 총회는 교단의 미래를 생각하며 준비된 사업들을 진행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교단 전체 교회들의 생각과 의중을 다 담아내기는 쉽지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단이 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