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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성서에 나타난 신학 산책

요한의 ‘독생자’ 기독론(6)

김광수 교수
(침신대 신학과 특임교수)

요한은 그의 복음서 서두에 나오는 로고스의 화육과 화육하신 로고스를 통한 하나님의 구원 활동을 다루는 구절들에서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유일한 존재성을 제시한다(1:14, 18).

요한은 영원한 신성의 창조주인 로고스가 역사상의 한 구체적 인간이 되어 그들 가운데 함께 거주하셨던 사실을 제시하고 그 속에서 그 분의 유일한 존재성을 특별한 용어를 통해 표현한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1:14a).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는 말은 말씀이 ‘육신’ 곧 ‘인간’이 된 것을 가리킨다. 그것은 신성의 존재가 인성의 존재로 변형된 것을 말한다. 그것은 또 그 영원한 신성의 존재가 살과 피를 가진 인성의 존재가 되어 인간의 구체적인 삶의 현장에 온 것을 나타낸다. 요한복음에서 ‘육신’이란 단어는 아주 드물게 나오는데, 신체 곧 살과 피를 가진 인간 존재라는 중립적 의미로 사용된다.


사도 바울도 그의 기독론적 성찰에서 화육과 관련해 이 단어를 사용했다: 하나님의 아들이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다(롬 1:3); 하나님이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냈다(롬 8:3); 그리스도는 육신으로 나타난바 되셨다(딤전 3:16). 이러한 신학적 맥락에서 이 단어의 사용은 인간으로서의 제한됨과 유한성을 강조하는 표현이다. 그러나 말씀이 육신이 되심으로써 말씀으로서의 영원한 신성의 존재가 변질된 것은 아니다. 화육하신 로고스는 인간이 되셨지만 말씀으로서의 존재를 유지하며 로고스의 역할을 완전하게 그대로 감당하셨다. 요한은 말씀이 어떻게 인간 존재가 되었는지에 관하여는 말하지 않는다.


그는 단순히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라고만 선언한다. 이런 점에서 화육의 신학은 마태와 누가에 나오는 동정녀 출생의 신학과는 매우 다른 신학적 입장을 반영한다. 동정녀 출생의 신학은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지만, 인간이 출생하는 방식과 동일한 방식을 따라 어머니의 태에서 잉태되고 태어났으며 어린 아기로부터 자라나 성년이 된 인간임을 강조한다.


그래서 예수의 출생 이야기들에 따르면, 예수는 그의 어머니를 통하여 태어난 것으로 제시되며 또 그것을 표현하기 위하여 부모가 아기를 ‘낳다’는 의미의 동사들이 사용됐다: ‘틱토’(마 1:21, 23, 25; 눅 1:31; 2:7); ‘겐나오’(마 1:20; 2:1, 4; 눅 1:35). 동정녀 출생의 신학에서 부각되는 것은 예수께서 그의 어머니를 통해 인간으로 태어났다는 것과 그렇지만 그것은 인간 아버지의 개입에 의한 것이 아니라, 성령을 통해 이루어진 하나님 자신의 신비한 개입에 의한 잉태와 출생이라는 신학적 진리를 제시한다(마 1:18; 눅 1:35).


반면에 화육의 신학은 인간으로 출생하는 것이 아니라, 단순히 인간이 됐다는 점이 부각된다. 어떻게 그렇게 됐는지는 직접적으로 설명되지 않는 것으로서 하나님의 비밀에 속한 부분이다. 그것은 천지의 창조자이신 하나님의 주권적 권능의 활동의 결과로 나타난 것이다. 화육은 부활과 반대 방향의 하나님의 권능의 활동을 가리킨다.


부활이 나사렛 예수라는 인간 존재에서 하나님의 존재 곧 하늘과 땅의 권세자가 되신 존재의 변형을 가리키는 반면, 화육은 부활과 반대 방향의 하나님의 역사로서 로고스라는 하나님의 존재에서 나사렛 예수라는 인간 존재로의 변형을 나타낸다. 이런 점에서 부활과 화육 모두 하나님의 주권적인 권능의 역사와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강조하는 신학을 대변한다.


영원한 신성의 로고스가 유한하고 가시적이며 육신의 존재가 됐다는 말씀은 가현설과 같은 영지주의적 교훈을 반대하려는 요한의 의도를 포함한다. 가현설(docetism)은 신성의 로고스가 실제로 육신의 존재가 된 것이 아니라, 단순히 육신의 몸을 입은 것처럼 보였을 뿐이라고 주장하는 견해다. 이러한 견해는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을 거부하면서 신성만을 강조하려는 입장에서 나왔다.


이것은 세상과 존재를 이분법적으로 생각하는-비가시 세계와 가시 세계, 위의 세계와 아래 세계, 그리고 정신 세계과 물질 세계-헬라주의의 이분법적 세계관과 인간관에 기초한다. 그 세계관에 따르면, 가시 세계는 물질과 육신의 유한한 존재로 이루어진 세계인 반면, 비가시 세계는 정신과 영의 무한한 존재로 이루어진 세계이다. 영지주의자들은 여기에 도덕적 이분법을 적용해 아래 세계는 악하고 위의 세계는 선하다고 생각했다.


그들에 따르면, 인간의 육신은 물질이며 아래 세계의 존재이기 때문에 악한 반면, 영혼은 영적이며 위의 세계의 존재이기 때문에 선한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의 구원을 가시적 육신 속에 갇혀있는 영원한 신성의 파편인 영혼을 구원하는 것으로 생각했다. 따라서 가현설의 바탕에는 어떻게 영원하고 비가시적이며 비물질의 신성의 존재(말씀)가 유한하고 가시적이며 물질의 존재(육신)가 될 수 있는지에 대한 헬라주의적 의심이 자리하고 있다.


그러나 요한은 이러한 헬라주의 사상을 정면으로 돌파하면서 영원하신 신성의 하나님이 역사 속에 구체적인 한 인간이 되신 종말론적 구원 사건을 선포한다. 요한은 그의 복음서 전체를 통해 말씀이 인간이 된 이 화육의 신비한 비밀을 설명하고 설득하기 위하여 노력한다. 또한 화육이라는 비밀스런 진리를 이해하는 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믿음으로 영접하는 것임을 강조한다.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인 줄 믿고 알았삽나이다”(6:69)라는 베드로의 고백과 같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신비한 구원을 이해하는 길은 먼저 그 분을 “나의 구주와 주님”으로 영접하고 신뢰하는 것이다(1:12; 20:31).


‘거주했다’는 말은 “장막을 치다” 혹은 “거처를 정하다”는 의미의 동사인데, 하나님이 광야의 장막에서 자기 백성과 함께 거주하신 것을 나타낸다. 출애굽 때에 하나님은 그가 이스라엘 백성 중에 거하실 수 있도록 성막을 치게 했다(출 25:8~9). 그래서 그 성막은 하나님이 자기의 백성 중에 임하시어 그들과 함께 동거하시는 현존의 장소가 됐다. 구약에서 ‘거하다’는 동사는 하나님이 이스라엘 중에 거하시는 것을 나타낸다(출 25:8; 29:46). 맹렬한 불같은 구름이 성막 위에 머물렀는데(출 24:16; 40:35), 그것은 하나님의 영광 곧 하나님의 임재의 모습을 묘사한다.


이스라엘의 예언 전승에는 하나님이 종말에 자기 백성 가운데 장막을 칠 것이 예언되어 있다: “나는 시온에 장막을 치는 주 너희 하나님인 것을 너희가 알리라”(요엘 3:17); “시온의 딸아 노래하고 기뻐하라 이는 내가 임하여 네 가운데 거처할 것이라”(슥 2:10); “이는 내 보좌의 처소, 배 발을 두는 처소, 내가 이스라엘 족속 가운데 영원히 거할 곳이라”(겔 43:7). 저자는 화육하신 로고스가 바로 세상에서 하나님의 임재의 새로운 처소임을 제시한다.


예수는 구약의 옛 장막을 대체하는 하나님의 새로운 임재의 처소이다(2:19~22). 저자는 또 “우리 가운데 거했다”고 말함으로써 ‘우리들’이라는 제자들의 공동체가 하나님의 현존의 장소임을 나타낸다. ‘우리들’이라는 제자들의 공동체가 하나님의 현존의 장소인 것은 고별 강화의 마지막 부분에서 강조될 내용이다(14:23; 17:21~24).


요한은 화육하신 로고스와 동거한 경험을 기초해 그 분의 존재를 설명한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1:14b). 요한은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았다고 말한다. 요한은 자기의 견해를 말할 때, ‘내가’라는 단수형 주어를 사용하지 않고 ‘우리’라는 복수형 주어를 사용한다. 이것을 통해 그는 자신의 개인적 견해보다는 공동체가 전체적으로 동의하고 고백하는 견해를 제시하려고 노력한다(3:11; 6:69). 요한복음 전체를 통하여 그는 예수의 제자들이 개인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서로가 서로에게 연합된 형태로 존재한다는 연합체적 성격을 강조한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제자들의 연합의 관계는 아버지와 아들의 연합을 구현하는 인격적이고 직접적이며 친밀한 것이 돼야 한다(17:21~24). 요한은 바로 앞 구절에서도 로고스가 화육하여 “우리 가운데 거했다”고 말함으로써 로고스의 화육을 공동체의 고백의 형태로 제시한다. ‘영광’은 요한복음에서 하나님의 아들로서 예수의 존재와 활동을 나타내기 위하여 사용된 핵심적인 단어다.


구약에서 영광은 하나님의 현현을 나타내는 시각적 모습(때때로 불과 구름의 모습)을 가리킨다(출 33:22; 신 5:21; 왕상 8:11). 영광은 곧 피조 세계에 강림하시어 권능으로 활동하시는 하나님의 임재와 활동을 가리킨다. 구약의 예언 전승에서 영광은 하나님의 종말론적 활동과 관련되는데(사 60:1; 합 2:14), 그 단어에 포함된 그러한 종말론적 중요성이 신약에서도 유지된다(막 8:38; 13:26; 롬 8:18; 벧전 4:13). 이렇게 ‘영광’이란 단어는 하나님의 임재와 종말론적 구원 활동을 나타내기 위하여 사용됐다.


요한복음에서 영광은 예수의 공생애를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현존과 권능의 활동을 가리킨다. 그래서 요한은 예수가 갈릴리 가나에서 물을 포도주로 변화시키는 첫 번째 표적을 행했을 때, “그의 영광을 나타냈다”고 표현한다(2:11). 예수는 십자가 사건을 가리켜 “인자의 영광을 얻을 때가 왔다”고 말한다(12:23). 예수를 통해 나타날 최종적인 영광은 그가 창세 전에 하나님과 함께 가졌던 영광으로 복귀하는 것이다(17:5). 요한을 포함해 예수의 공생애의 목격자들은 그의 활동 속에서 하나님의 임재와 권능의 활동을 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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