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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성서에 나타난 신학 산책

요한의 ‘독생자’ 기독론(7)

김광수 특임교수
침신대 신학과

요한은 예수님의 공생애를 통해 나타난 영광을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라고 말한다. ‘독생자’로 번역된 단어(‘모노게네스’)는 본래 “단 하나의” 혹은 ‘유일무이한’이라는 의미의 형용사이다. 요한은 예수의 존재의 특별한 성격 곧 하나님과 유일한 관계를 가진 존재를 나타내기 위하여 이 단어를 사용한다(1:18; 3:16, 18).

“아버지의 독생자” 혹은 “하나님의 독생자”란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세상의 어느 누구도 혹은 세상의 어떤 존재도 가질 수 없는 특별하고 유일무이한 관계의 존재 곧 창세 이전부터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하나님과 동일한 신성의 존재이셨으며, 화육하셨고, 죽으셨으며, 부활하심으로 아버지 하나님께로 돌아가셨고, 아버지와 아들의 신비한 연합이 완결되셨으며, 이제는 보혜사 성령의 존재로 그의 제자들에게 다시 오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킨다.


그런데 독생자라는 용어에서 중간에 위치한 ‘생’은 육신을 가진 인간으로의 출생을 가리킨다. 하나님의 아들이 인간으로 출생한 것은 동정녀 출생의 신학에서 부각된 것이다. 그렇지만 앞에서도 언급되었듯이, 요한은 동정녀 출생의 신학과는 다른 화육의 신학을 부각시킨다. 화육의 신학에서는 인간으로 태어난 것이 아니라 단순히 인간이 된 것이다. 그래서 영어권의 학자들 사이에 이 단어의 번역을 놓고 ‘독생자’(the only begotten son) ‘독자’(the only son) 사이에 많은 논쟁이 있어왔다.


‘독자’라는 단어가 하나님에 대한 예수 그리스도의 유일한 관계성을 나타내는 점에서 요한의 신학을 더 반영한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화육의 신학도 결과적으로는 로고스가 육신 곧 살과 피를 가진 인간 존재가 된 것을 가리키기 때문에, 독생자라는 단어가 신성과 인성의 신비로운 연합이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유일한 존재의 모습을 설명하는데 더 적절한 면을 갖고 있다. 따라서 독생자와 독자 중에서 어느 것을 취하든지, 그 단어가 각각 강조하는 면을 이해하면서 사용하는 것이 필요하다.


요한은 아버지의 독생자가 보여준 공생애의 모습을 한 마디로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다”고 표현한다. 은혜는 요한복음에서 네 번만 나오는데, 그것도 로고스 찬미가에만 나온다(1:14, 162, 17). 진리는 요한이 예수 그리스도의 존재와 사역을 나타내기 위하여 즐겨 사용한 단어다. 구약에서 은혜와 진리는 하나님께서 자기 자신의 계약과 그 계약의 백성에 대하여 가지는 충성과 신실하심을 가리키는 점에서 밀접하게 연결된다. 은혜가 받을 자격이 없는 사람에게 값없이 베푸시는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하심을 가리키는 반면, 진리는 계약을 반드시 그대로 이행하시는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일관되심을 가리킨다. 그래서 은혜와 진리는 세상에서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다루시는 두 가지 중심적 통치 원리를 나타낸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불쌍히 여기시고 사랑을 베푸시면서도 자기 백성과 맺은 계약을 이행하는 일에 있어서 신실하시며 일관되시다. 요한은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활동의 이러한 두 가지 중심적 원리가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충만하게 나타난 것을 언급한다. 요한은 특히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진리와 관계시킨다.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에 의하여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구원의 계시를 가리킨다(1:17; 8:32; 16:13; 17:17, 19). 예수 그리스도는 자기를 믿는 사람들을 진리로 인도하며 또 그 진리는 사람들에게 참된 자유를 제공한다(8:32). 나아가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 진리로 언급되는데, 이것은 그 분의 사역이 하나님의 목적의 최종적 성취이며 완성이기 때문이다(14:6).


저자는 화육하신 로고스를 통하여 사람들을 생명과 빛으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감격하면서 그를 통하여 받는 충만한 은혜를 말한다: “우리가 다 그의 충만한데서 받으니 은혜 위에 은혜러라”(1:16). ‘충만’이란 단어는 요한복음에서 여기에만 나온다. 그것은 영지주의 문헌들에서 자주 사용된 용어인데, 후기 바울 서신들에도 나온다(골 1:19; 2:9; 엡 1:23; 3:19; 4:13). 그러나 저자가 이 단어를 영지주의적으로 사용한 것은 아니다. 그는 화육하신 로고스를 통하여 나타난 하나님의 은혜와 진리의 충만함을 이런 방식으로 반복하여 표현한 것이다. “은혜 위에 은혜”라는 말은 그리스도인의 삶이 기본적으로 하나님의 은혜 위에 기초하고 있음을 강조한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한 은혜 위에 또 다른 은혜가 주어지는 은혜의 연속인 셈이다.


이 구절을 다음 절(1:17)과 관계시켜 율법이라는 옛 계약의 은혜가 은혜와 진리라는 새 계약의 은혜로 대체되었다는 의미로 이해하는 견해도 있다. 아무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삶은 처음부터 끝까지 은혜로 충만한 삶이다. 요한은 여기서도 “우리가 다”라고 표현함으로써 이 고백의 공동체성을 부각시키고 또 나아가 하나님의 충만한 은혜는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된 모든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선물임을 강조한다. 요한복음 전체를 통하여 요한은 하나님의 은사의 계급적 이해를 강하게 반대한다. 일부 사람들만이 아니라 “우리가 다” 하나님의 충만한 은혜를 경험할 수 있다는 것이다(cf. 골 1:28).


요한은 은혜 위에 은혜를 받는 삶을 모세와 예수 그리스도를 대비시켜 설명한다: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신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1:17). 여기서 예수 그리스도라는 이름이 처음으로 나오는데, 지금까지 로고스라는 별명으로 불리우던 존재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이 명백하게 제시된다. 모세와 예수 그리스도의 대비는 앞 절에서도 이미 암시적으로 제시되었으며 또 그것은 예수와 유대교 지도자들 사이의 격렬한 논쟁의 중심을 이룬다. 유대인들은 모세를 통해 주신 율법을 이스라엘에게 주신 하나님의 선물로 인식해왔다. 요한복음에서 유대인들은 자기들을 “모세의 제자들”로 지칭하고 또 율법을 모세를 통해 주신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정한다(9:28~29).


그러나 요한은 율법이 궁극적으로는 예수 그리스도를 증언한다는 것(5:39)과 모세의 역할을 일차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거부하는 사람들에 대하여 고소하는 자로 제시한다(5:45).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를 증언하는 점에서 모세의 법이 아직 유용하지만, 유대인들은 아직 그것을 오해하며 오히려 율법을 불순종하고 있다는 것을 부각시킨다(5:40). 율법에 대한 저자의 이러한 견해는 율법이 믿음으로 말미암는 구원으로 인도하는 가정교사의 역할을 하며(갈 3:24) 혹은 죄의 본성을 드러나게 한다(롬 7:7)는 사도 바울의 견해와 유사하다. 따라서 율법의 유용성은 인정할 수 있지만, 그러나 하나님의 구원의 본질인 은혜와 진리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이다.


요한은 화육하신 로고스의 사역의 핵심을 언급하면서 로고스에 대한 찬미를 마친다: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1:18). 하나님은 근본적으로 보이지 않는 존재이며 혹은 인간이 하나님을 직접적으로 보는 것은 부적절하며 안전하지 않다는 것이 구약의 일반적인 전제이다(신 4:12; 시 97:2). 그래서 아무도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다는 것이 구약에서 빈번하게 제시된다. 심지어 회막에서 하나님을 대면하고 하나님의 음성을 직접 들었던 모세조차도 하나님을 얼굴로 보지 못하고 등만을 보게 될 것으로 예고된다(출 33:20-23).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아버지의 품속에 있던 “독생하신 하나님”으로 묘사된다. 여기서 ‘독생하다’라는 형용사가 요한복음서에서 두 번째 사용되었으며 또 여기서도 그 형용사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유일한 존재성이 표현되었다. “아버지의 품속에 있다”는 말은 아버지가 어린아이를 품에 앉고 있는 영상을 통하여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 사이의 가깝고 친밀한 연합의 관계를 묘사한다.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이러한 특별한 관계성은 요한복음 전체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존재와 관련하여 특별히 강조되는 주제이다.


“독생하신 하나님”이란 어구 대신 “독생하신 아들”이란 어구로 된 사본들도 존재한다. 전자가 화육하신 로고스의 신성을 부각시키는 반면, 후자는 신성의 존재이면서도 화육하여 인간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을 부각시킨다. “독생하신 하나님”이든지 혹은 “독생하신 아들”이든지 그것은 완전한 하나님이면서 동시에 완전한 인간인 예수 그리스도의 유일한 존재성을 가리킨다. 예수 그리스도가 그의 공생애를 통하여 행한 사역의 핵심은 하나님을 나타내는 것이다. ‘나타내다’는 단어는 “시 혹은 이야기를 해설하다” 혹은 “신령한 비밀들을 설명하다”라는 의미로 사용되었으며 그래서 헬라주의 지식인들에게 익숙한 단어였다.


로고스 찬송시가 헬라주의 문화에 익숙한 이 단어로 끝맺은 것은 헬라인들에게 다가가려는 요한의 입장을 반영한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활동 곧 은혜와 진리가 충만한 사역을 통하여 나타나고 설명되기 시작했다. 요한복음에서 하나님을 나타낸다는 것은 하나님의 종말론적 구원 활동 곧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주어지는 하나님의 은혜와 진리를 나타내심을 통하여 어둠 속에서 멸망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공급하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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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다시 사셨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그의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벧전 1:3) 2024년 부활절을 맞이하여 3500침례교회와 목회 동역자. 성도들 위에 그리스도의 부활의 생명과 기쁨과 회복의 은총이 충만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우리가 죄인으로 영원한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는 존재에서 예수님의 죽으심과 다시 살아나심으로 영원한 생명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역사적인 순간입니다. 이 부활의 기쁨과 감격이 없다면 우리는 아무것도 아닌 존재입니다. 이 땅의 창조주이신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에 직접 주관하시고 인도하시며 이제는 구원의 완성으로 진정한 하나님 나라의 백성을 몸소 가르치시고 보여주시기 위해 그의 아들을 보내주신 사실을 믿고 기억해야 합니다. 그 분은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셨고 가르치셨으며 가난한 자, 병든 자, 소외된 자, 고난 받는 자를 치유하시고 회복시키셨습니다. 그 회복을 통해 우리는 이 땅에 믿음의 공동체를 세웠습니다. 그 공동체의 핵심은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과 부활의 놀라운 소식입니다. 이 소식이 복음의 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