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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귀를 제어한 치유의 십자가

한명국 목사의 회상록

한명국 목사
예사랑교회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요10:10)


“아이고! 화산댁, 아들 낳아 반갑네요!” 두각댁이라는 이웃 할머니는 새끼줄에 고추가 달린 금기를 보고도 무례하게 들어와 어머니께 축하인사를 했다. 당시 부모님은 종교가 달랐다. 부친의 증조부께서도 유도(유교)를 신봉했고, 그 후손도 계속 유학을 배우고 살아오셨다고 했다. 어머니는 무속종교와 불교를 믿어 왔다.


내가 어릴 적에 어머니는 밖에 나갔다 들어오실 때 ‘객귀’를 물리친다고 마당에 십자가 표시를 긋고 칼을 한복판에 꽂아두기도 하셨으며, 부엌 부뚜막 위에 찬물과 표주박에 쌀을 넣어놓고 조상신을 섬기셨다. 동생들을 낳으셨을 때는 ‘삼신’에게 정수를 떠 식사판 위에 놓고 빌기도 하셨다. 물건을 옮길 때도 조심하고 이사를 할 때도 ‘손 없는 날’ 과 방향을 택하셨다. 그 외에도 어떤 일을 할 때에 귀신이 무서워서 점을 치기도 하시고, 집에 늘 드나드는 여승 양남댁에게 묻기도 하셨다.


그날 두각댁이 왔다간 후 아이는 젖도 먹지 않고 시도 때도 없이 잠도 안 자고 계속 울기만 했다. 소위 불신자와 무당의 말로 “부정을 탄 것”이었다. 두각댁의 남편이 고기잡이로 바다에 나갔다가 물에 빠져 죽은 귀신이 붙었다고 했다. 어머니는 힘을 다해 간호하고 달래었으나 수개월을 끌었다.


나중에는 어머니마저 아기가 애처로워지기 시작했다. 어릴 때 나는 어머니께 물었다. “나는 쌍둥이가 아니고 형인데 왜 동생하고 키가 똑같이 자라요?” 어머니는 대답하시기를 “너는 애기 때 석 달간 젖배를 곯아서 그래.”라고 말씀하셨다. 어려서 젖배를 곯은 것은 일평생 신체건강에 큰 지장을 준다는 사실을 자라면서 더욱 잘 알게 됐다. 하루는 마당에 감자를 캐다놓고 방에 들어온 아버지와 안방에 있던 어머니 사이에 말다툼이 오고갔다.


두 분은 뱀띠 동갑내기셨다. 아버지는 종일 일하고 집에 들어왔는데 가난한 살림살이 때문에 아내가 바가지를 긁고 있는데다가 애새끼마저 깽깽거리고 울어재끼니 그만 19세의 젊은 서방은 홧김에 아기를 들어 마당의 감자 위에 집어 던지고는 밖으로 나가 버렸다. “깩”하고 소리가 그치더니 아기는 기척이 없었다. 어머니가 얼른 방에서 달려 나가 아기를 안아보니 죽어버렸다.


“차라리 나를 던지지, 죄 없는 애기를 왜 던지는고!” 하며 온돌방 아랫목 따뜻한 곳에 아기를 포대기로 싸서 눕히고 빨리 미음을 끓여 하늘님께 간정히 기도하며 정성스레 먹였더니 살아났다고 했다. 아이가 죽음으로 악귀는 떠났고 하나님의 뜻이 계서 아이를 살려 복음전도의 일을 하게 하셨다.


아버지는 일찍이 서당에서 유교학문을 공부하여 유교 신봉자가 되셨다. 나이 30세에 들어서면서 ‘지은 죄를 어떻게 속죄받을 수 있을까?’ 하는 번민 끝에 유학에서 찾을 수 없는 속죄의 도리가 불교에는 있을까 해서 백숙모의 오빠가 주지로 있는 절의 권이득 승려에게 2년 가까이 찾아가서 불도를 배웠다. 그러나 속죄의 도리를 찾지 못했다. 때마침 남들이 교회에는 ‘속죄의 도리가 있다’하여 할아버지께 허락을 받아 교회에 조금 다녔다. 그러나 졸음이 오고 뭐가 뭔지 도무지 깨닫지 못해 중단했다.


수개월 후 이미 별세한 사촌 동서뻘 되는 사람이 생시와 똑같이 방에 들어서는 것을 본 아버지는 ‘수저와 국만 한 그릇 더 갖고 오면 밥을 나누어 국에 말아 먹겠다’고 부엌에 있는 어머니에게 소리치셨다. 어머니는 방문을 열고 “3개월전에 쥐약 먹고 죽은 사람인데 어디 있느냐?”고 하자, 아버지는 “금방 여기 방문을 열고 들어왔는데, 어데 갔노?” 하면서 “죽어서 갈 곳은 안가고 어딜 찾아오느냐?”고 소리치며 분노하셨다.


그 후 계속해서 환영이 나타날 때마다 아버지는 더욱 큰 소리로 꾸짖다가 더욱 자주 나타나자 발작하기도 하고 넘어져 쓰러지기도 하셨다. 그래서 어머니는 사귀병을 고치기 위해 외삼촌의 병원에서 신약으로 치료하고 한약도 지어먹고, 귀신 떼는 신침을 맞기도 하고, 돈을 많이 주고 큰 문종이에 쓴 부적을 집안 곳곳에 붙였는가 하면, 경비를 많이 들여 절에서 특별 불공을 했고, 무당과 박수를 불러 귀신을 쫓는 특별 굿을 하고 쌀 한가마니를 줬는데도 아무런 차도가 없었다.


저동교회의 목사님과 교인들이 찾아와서 예배를 보았고, 한 달 가까이 주일과 수요일에 계속 예배하였다.

목사님께서는 부적을 뗀 자리에 붉은 색 물감으로 십자가를 그린 문종이를 대신 붙이셨다. 교인들 말로 “이 보혈의 십자가는 귀신이 가장 무서워한다는 것”이라고 했다. 아버지는 한 달만에 감쪽같이 나았고 교회에 나가시자 온 가족이 함께 교회에 나갔으며 아버지를 통해 그 후 외가와 친가의 식솔들도 많이 예수님을 믿게 됐다.


보혈의 십자가 종이는 그 후에도 오랫동안 우리 집에 붙어있었는데 마치 불신자들의 부적같이 느껴져서 내가 신학교에 들어가면서 그것을 떼어 버렸다. 그러나 그것은 원수 마귀가 가장 무서워하는 상징이라는 사실을 목회생활 후에 더 잘 깨달았다. 적십자의 깃발은 악한 원수 마귀를 분명히 물리치는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과 영원한 승리의 상징이다.


1964년 3월 8일, 충남 대덕군 기성면 도안리에 있는 도안교회를 찾아갔다.
신학생 전도사라도 갈 사람이 없어서 선교사가 문 닫으려는 교회라는 소리에 자원하여 찾아가니 이교성 청년과 이제자, 김용분 여청년과 아주머니들, 초등학생 졸업생 강금례, 박봉순을 합하여 8명의 교인이 있었다. 예배 후에 보니 점심밥 해줄 사람이 없는 것 같았는데 한 아주머니가 초청하여 밥 위에 밥을 높이 얹어 된장찌개로 대접을 받았다.


식사 후에 아주머니의 얼굴을 자세히 살펴보니 몸은 건장한데 근심이 가득 차 있었다. “무슨 병이 있으세요?”라고 물었더니 작년에 용문산 기도원에 가서 3개월 가까이 기도하고 안수 받았는데 낫지 않아 돌아왔다고 했고, 집에서 키운 송아지를 팔아 약을 먹고 치료했는데도 아무런 효과가 없었다고 했다. 3일간 들에 나가 일하다가 넘어지면 4일쯤 드러누워야 하고, 4일쯤 일 잘하다가 넘어지면 3일쯤 드러눕는다는 것이었다.


처음 목회현장에 간 27세의 갓 신대원에 입학한 나로서는 사귀병으로 예감이 들어서 평생 처음으로 한의사들의 방식대로 아주머니의 왼손을 잡고 진맥을 해 보았다. 나는 옛날에 아버지가 치유받을 때를 기억하며 흰 종이에 크레용으로 붉은 십자가를 그려 안방 문 위에 붙이고 기도해 주었다.


한 달간 매주일 갈 때마다 식사 대접을 받고 간절히 기도해 줬다. 십자가와 보혈의 붉은 상징은 악귀가 가장 싫어하는 주님의 권능이 있었다. 아주머니는 한 달 만에 감쪽같이 나았다. 귀신은 아주머니와 그 집에서 떨며 도망간 것이었다. 성순의 어머니의 치유로 전도의 문이 열려 도안교회가 부흥하는 계기가 됐다.
“마귀의 간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입으라”(엡6: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