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 나라를 여행하는 일이 결코 좋지만은 않은 이유는 좁은 비행기를 장시간 불편하게 타야하고 기후나 음식 등이 잘 맞지 않는 것도 있지만 무엇보다 시차(時差)로 인한 적응의 어려움이 크다.
이번에 다녀온 남아공도 우리나라와는 7시간의 시차(時差)가 있다. 우리나라가 7시간 빠르다. 그러니 우리가 거기 도착한 오전 10시는 우리나라로는 오후 5시였던 것. 그건 그런대로 괜찮았다.
하지만 내가 강의를 시작한 시간은 그날 오후 4시, 우리나라로 치면 밤11시경이었다. 비행기 안에서도 거의 잠을 못 이루었음을 고려할 때 그 시간은 참 쉽지 않은 시간이었다.
오죽하면 선교사님들에게 이런 농담까지도 했을까? “한국으로 치면 이제 저도 서서히 졸릴 시간이니, 혹 강의하다 헛소릴 하더라도 이해해주십시오.” 하지만 다행히 정신을 바짝 차린 탓에 강의는 은혜롭게 잘 마칠 수 있었다.
어쨌든 그렇게 남아공에서의 열흘은 오전엔 멀쩡, 오후는 헤롱이었다. 그렇게 그쪽 시간에 어느 정도 맞춰져갈 때 난 다시 한국으로 돌아왔다. 그러니 또 시차 문제가 생겼다.
이젠 한국의 오전이 힘들어졌다. 거기는 밤이었으니까. 저녁만 겨우 말똥말똥하다. 거기는 낮이었으니까.
그래서 지난 주일 오전예배는 얼마나 힘들었는지 모른다. 보통의 경우에도 4번의 연이은 설교는 마음 단단히 먹고 체력 비축해야 가능한 일이지만 지난 주일 피곤은 정말 말도 못했다. 게다가 오후엔 전교인볼링대회도 있었다. 밤엔 외할머님 생신도 옥천에서 있었다. 주중엔 성도 장례도 있었다. 학교 강의도 있었다. 게다가 아버님 병환까지 급히 살필 일이 있어 부산도 다녀와야 했다. 날 기다리는 결재서류는 이미 산더미가 되어있다. 정말 어떻게 한 주간을 보냈는지 모른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 무엇 하나도 실수하거나 그르친 일이 없어 감사하다. 남아공에서의 열흘도, 한국에서의 열흘도. 비몽사몽 중 강의였지만 남아공 선교사님들은 너무 은혜로웠단다. 우리 성도들은 지난주일 말씀도 그랬단다. 농담 삼아 부목사님들께도 “헛소리한 거 없었냐” 물었더니 더 은혜로웠단다. 아~ 난 약간 제정신이 아니어야 더 은혜로운가 보다. 이참에 제 정신 놔두고 성령 정신으로만 해야 할까 보다. 하기야 지난주일 볼링도 170점을 쳤다. 이상하게 그날은 던지기만 하면 다 맞았다. 막판에 성도들이 우루루 와서 지켜보지만 않았다면 능히 200점은 됐으리라.
그래서 난 깨닫는다. ‘시차’(時差)는 그냥 ‘시차’(視差)일 뿐이라고. ‘시각’은 ‘생각’으로 극복될 수 있다고. 남아공에 가면 한국의 시간을 잊고, 한국에 오면 남아공 시간을 잊으면 되는 것이라고. 그러니 우리의 힘듦은 자꾸 저쪽 시간을 기억하기에 생기는 문제들이라고. 자야 할 시간이라고 자꾸 묵상하며 깨어있기에 더 졸리는 것이라고….
그러니 어디 이런 어려움이 시차(時差) 문제에만 국한될까? 인생도 목회도 그러하다. 실수 좀 했던 과거의 시각으로 지금의 나를 평가하면 여전히 나는 무기력하다. 주님은 날마다 우리를 새로운 피조물로 만드신다. 그러므로 오늘의 나는 과거의 내가 아니다. 멋진 내일을 위해 준비된 나일뿐이다. 한번 목회의 실패가 다음의 실패를 또 부를 수 없다.
Here & Now! 난 지금 여기에 있다. 거기엔 없다. 난 이미 떠나왔다. 그러니 거기, 그때(That time & That place)는 잊어버리자. 지금 여기에 충실하자. ‘그때, 거기’ 때문에 ‘지금, 여기’까지 망치지 말자.
시차(時差)는 시차(視差)일 뿐이다. 시차(時差)는 시차(視差)로만 극복된다. 정말 중요한 것은 내가 지금 ‘어디에 있느냐’보다 ‘어떻게 보느냐’이다.
김종훈 목사 오산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