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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콤 C. 펜윅(Malcolm C. Fenwick)의 북방선교-2

안희열 교수
침신대 신학과
(선교학)

원산총부와 교단의 지도자들


II. 동아기독교의 북한 교회개척과 북방선교

동아기독교의 북한교회는 해방 전·후로 나뉜다. 전자는 동아기독교의 북방선교가 성공한 때이고, 후자는 북한이 공산화가 되면서 동아기독교의 북한교회가 쇠락하여 소멸한 때이다. 그렇다면 동아기독교의 북한교회가 북방선교의 교두보 역할을 어떻게 감당했는지 살펴보자.


1. 해방 전 동아기독교의 북한교회 성장
1) 교세
해방 전 남북한, 만주, 시베리아 전역에 동아기독교의 교세는 약 250개 교회에 1만 명 성도를 지닌 규모였다. 이는 장일수가 “(1944년 5월 10일 동아기독교)폐교 당시 전 동아기독교회 수는 250여 처였고, 침례교인이 만 명이었다”라고 술회한 것에서 알 수 있다. 김용해와 이정수도 1940년 동아기독교회의 교회가 250개였음을 밝히고 있으며, 이는 장일수가 언급한 것과 동일하다. 그런데 김용해와 이정수는 한반도 전역에 24개 구역에 100개의 교회가 있음을 밝혔는데, 이에 따라 남북한 동아기독교회의 교세가 어떠했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1946년 2월 9일 칠산교회에서 교단 재건회의가 있은 후 “(동아기독교)교회의 분포는 남한보다 북한이 훨씬 우세했고 교단의 시련으로 이 교단 재건회의에서 수습할 수 있는 남한의 교회는 약 40(개)교회와 약 350명의 교인에 불과하였다”라는 보고로 미루어보아, 한반도에 100개의 동아기독교회 중에서 북한교회의 교세가 남한교회보다 뛰어났음을 알 수 있다. 그래서 해방 이전 동아기독교의 북한교회는 약 60개 정도로 유추할 수 있다.


2) 북방선교 전략 센터, 원산총부
펜윅은 1891년 가을 소래에서 원산으로 이동해 사역을 시작함으로 ‘개신교 최초의 원산 선교사’가 됐다. 그가 원산에 도착할 당시 원산 인구는 1만5000명 정도였고, 1920년 12월 말에는 총 6,380호(戶)에 2만7585명이었다가, 1930년 말에는 총 9,153호(戶)에 4만3060명으로 인구가 증가한 도시였다. 펜윅은 선교지 분할 정책의 빠른 진행 속도를 알고 재빨리 타교단이 교회개척을 하지 아니한 원산으로 이동했는데, 이후 원산은 동아기독교의 북방선교를 총괄하는 총부(摠部)가 됐다.


원산총부의 초창기 주소는 함경남도 원산시 관교동 144번지였다가, 이후 펜윅이 1935년 별세할 당시 원산자택 주소는 함경남도 원산부 명석동 144번지로 바뀌었다. 무엇보다 펜윅은 감목(총회장)으로 직분 임명권, 구역 파송권, 포교 관리 및 감독권을 가졌기 때문에 원산총부가 동아기독교의 ‘북방선교 전략 센터’가 되는데 큰 기여를 했다.


펜윅은 1906년 대한기독교회를 설립하자마자 그 해의 대화회(총회)에서 한태영, 이자삼, 이장운, 장봉이, 유내천 5명을 “함경도와 간도”로 파송했고, 이후 1910년에 1차 시베리아(포시에트와 블라디보스토크) 방문을 마치고 돌아온 후 원산총부는 9명의 순회전도자를 두만강 지역에 파송했는데 10개월도 안 되어 45명의 신자를 지닌 교회가 10개나 개척됐다. 이처럼 함경도는 북방선교의 교두보 역할을 톡톡히 감당했고, 동아기독교는 이곳에서 교회개척에 힘썼다.


3) 원산 선교기지, 원산교회와 원산농장
동아기독교의 중심지였던 원산교회는 펜윅 선교사 자택에서 약 2백 미터 내려온 곳에 위치해 있었는데 150평 대지에 50평의 디귿[ㄷ]자 목조 건물로 약 30~40명 정도의 교인들이 있었다. 원산교회는 펜윅 선교사를 이어 전치규 목사, 김영관 목사, 이종근 목사 등이 감목(총회장) 생활을 하면서 목회했고, 특히 해방 전 교단의 대화회가 무려 15회나 이곳에서 열려 전체 대화회 중 43%를 차지할 만큼 동아기독교의 상징적 교회가 됐다.


그런데 원산교회 창립연도에 관해 논쟁이 있어 왔는데 여기에는 주로 3가지 설이 있다. 첫째로 1893년 이전설이다. 펜윅이 1891년 가을 원산에 도착한 이후 1893년 본국으로 귀국하기 이전 그가 구입한 원산농장의 ‘원산 선교기지’(Wonsan Mission Station)를 통해 첫 예배를 드렸다는 설이다. 당시 초창기 내한 선교사들은 ‘선교기지’(mission station)를 세운 뒤 사역하는 것이 관례였는데 충청도의 ‘강경 선교기지’와 ‘공주 선교기지’를 마련해 강경침례교회와 공주침례교회(현 꿈의교회)를 개척했던 에드워드 폴링(Edward C. Pauling)의 경우가 그렇다. 따라서 당시의 선교관례를 펜윅에게 적용한다면 펜윅 역시 ‘원산 선교기지’를 통하여 원산교회를 개척했을 가능성이 높다.


둘째로 1896년 봄설이다. 펜윅이 1893년에 귀국한 뒤 1896년 봄 원산에 도착한 후 원산교회를 개척했다는 설이다. 왜냐하면 그가 약 3년간 미국과 캐나다를 방문하면서 1894년에 목사 안수를 받았고, 이 때 한국순회선교회(Corean Itinerant Mission, CIM)를 조직하면서 그의 선교 정책과 방향이 뚜렷하게 세워졌기 때문이다. 김태식이 “(원산교회)첫 예배는 그가 원산에 돌아와 몇 일 뒤에 드려졌는데, 그 자리에서 한국인 7명이 그리스도를 영접했다”라고 주장한 것을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셋째로 1909년 설이다. 이는 현재 문서상으로 알려진 원산교회 창립연도이다. 이때는 대한기독교회라는 교단이 이미 조직된 상태여서 1909년은 원산교회가 ‘조직교회’로 세워진 때라 볼 수 있다. 하지만 펜윅이 함경북도 경흥구역의 고읍교회를 1908년 봄에 개척한 점을 고려해 보면 이는 논쟁의 여지가 있다. 펜윅이 원산총부가 예배 드렸던 원산교회를 고읍교회보다 늦게 개척할 리가 없기 때문이다.


연구자는 원산교회 창립연도에 관해 ‘1893년 이전설’을 지지한다. 그 이유는 초창기 내한 선교사들은 선교기지를 통해 교회를 개척하는 것이 통상적이었기에 펜윅 역시 원산농장의 ‘원산 선교기지’를 통해 첫 예배를 드렸을 가능성이 높다. 특히 동아기독교의 교회개척은 ‘건물’(building)이 아닌 ‘집’(house)에서 예배드리는 ‘가정교회’ 스타일이 대다수였음을 적용해보면 원산교회 역시 원산농장의 펜윅의 ‘집’에서 첫 예배가 드려졌음을 유추할 수 있다.


따라서 원산교회의 창립연도는 수정돼야 할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원산시를 침례교회가 최초로 교회개척이 이뤄진 곳으로 봐야한다. 당시 원산에는 9개의 동아기독교회가 세워졌는데 원산교회, 통천교회, 송방교회, 유동교회, 염성교회, 장진교회, 신상교회, 속후교회, 장의교회이다. 무엇보다 펜윅의 원산 선교기지는 ‘교회-농장’이라는 이중 구조의 특징을 지니고 있었는데, 이는 당시 타교단의 선교기지인 ‘교회-학교-병원’이라는 삼각편대와는 사뭇 달랐다. 펜윅이 원산기지를 통해 자립과 자전 선교 배양에 힘썼다면 타교단의 선교기지는 자립선교, 인재양성, 사회참여 확대에 강점을 두어서 둘 사이에 차이가 있었음을 볼 수 있다.


초창기 원산총부와 원산농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