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세상은 건물은 높아졌지만 인격은 작아졌다. 고속도로는 넓어졌지만 시야는 더 좁아졌다.
소비는 많아졌지만 더 가난해졌다. 더 많은 물건을 사지만 기쁨은 줄어들었다. 집은 커졌지만 가족은 더 적어졌다. 더 편리해졌지만 시간은 더 없다.
학력은 높아졌지만 상식은 부족하고, 지식은 많아졌지만 판단은 모자란다. 전문가들은 늘어났지만 문제는 더 많아졌다. 약은 많아졌지만 건강은 더 나빠졌다. 많이 소유하기 위해 돈을 쫓아 살았다. 그러다보니 인격이 작아졌다. 가족을 놓쳤다. 건강을 잃었다. 크게 소유했지만 존재의 크기는 작아졌고, 행복을 잃었다.
감히 말해본다
식욕은 몸의 문제가 아니라 정신의 문제다. 사는 동안 불필요한 잉여욕망과 싸워야 한다. 새들은 적게 먹고 적게 배설한다. 새들은 날기 위해서 뼛속까지 비운다. 그렇다고 새들이 불행하다는 증거는 하나도 없다. 뼛속까지 비웠다고 새들이 행복하지 않다는 증거도 없다. 오히려 새들은 하늘을 자유롭게 날며 잘 먹고, 잘 산다.
가진 것이 적었을 때가 걱정거리가 가장 적었다. 감히 말해본다. 부족할 때 보다는 풍족했을 때 더 괴로움이 많았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적게 가지면 괴로움도 적고, 바라는 것이 작으면 불안과 두려움도 줄어든다. 그러나 많이 가지면 괴로움도 덩달아 커진다. 그러므로 많은 것은 작은 것이고, 작은 것은 큰 것이다. 많이 가진 사람은 작은 사람이고, 적게 가진 사람이 큰사람이다.
‘내’가 있는 집
“정말 잘 사는 사람들은 적게 먹고, 적게 쓴다. 적게 먹고 적게 쓰면 적게 벌어도 부족하지 않다.” 이것이 현명한 소비다. 하나를 잃으면 하나를 얻는 법이다. 집 안이 가구와 물건들로 가득 차 있으면 공간은 그만큼 줄어든다. 물건들이 주인 노릇한다.
반대로 집 안의 물건을 치우면 공간이 많아진다. 집 안에 여백이 많아진다. 여백 있는 삶, “내”가 있는 집이 된다. 더 단순하게 살아라. 더 많이 비우고, 더 덜어내라. 그러나 생각은 크게 품어라. 인생을 다운사이징(Downsizing)하라.
A.I 인공지능시대 불어오는 삶의 패러다임이고, 트랜드다. 음식이든 인생 그 자체의 크기를 줄이라는 말이다.
더 단순하게 살아라
“최소의 소유로 최대의 행복을 누리는 법을 찾아라. 그것은 작게 사는 것이다.”
정석주 시인의 “단순한 것이 아름답다”라는 책에 나오는 내용이다. 단순함의 예찬은 “작은 것은 크다.”라는 생각에 바탕을 두고 있다.
적게 갖고 적게 먹으며, 작은 욕망으로 살 줄 알아야 단순해진다. 더 단순해져야 큰 행복을 누릴 수 있다. 지금 세상의 흐름은 변하고 있다. 심플해지고 작아지려는 흐름은 새로운 패러다임이다. 디자인 트랜드를 선도하는 북유럽의 감성, 아이폰으로 친숙한 애플 제품들도 모두 단순함에 최고의 가치를 두고 있다.
비워야한다
예수님께서도 “크고자 하는 자는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고,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종이 되어야 한다.
나는 섬김을 받으로 오지 않았다. 섬기러 왔다. 내 목숨을 많은 사람들의 대속물로 내주기 위해 왔다”고 말씀하셨다. 그렇다. 더 많이, 더 큰 자리를 가지려고 할 때, 시기 다툼이 생긴다. 그것은 땅의 것이다. 악한 것이다.
하나님을 흉내 내는 것이다. 모든 혼란과 악한 일이 발생한다. 더 많이 가지려는 것, 더 높은 자리 오르려고 하는 것, 버려야 한다. 비워야 한다. 더 작아져야 한다. 많이 가지려는 사람은 작은 사람이고, 적게 가지려는 사람이 큰 사람이다.
흙으로 돌아가라
전쟁의 승패는 내면에서 갈린다. 군사력의 크기에서 갈리는 것이 아니라 내면에서 갈린다.
다윗과 골리앗이 싸울 때 군사력을 가지고는 비교가 안 되었다. 그러나 다윗이 이겼다. 칼과 창과 단창은 골리앗이 월등했다. 비교할 수 없었다. 그러나 전쟁의 승패는 군사력에서 나오지 않았다. 내면에서 나왔다.
통쾌하게 다윗의 승리였다. 인생의 승패는 내면에서 나온다. 내면의 힘은 나를 버리는 것이다. 비우는 것이다. 나누는 것이다. 녹아 없어지는 희생이다. 내가 죽는 것이다.
이것이 흙의 사람이다. 흙은 없음이다. 티끌이다. 에노스(Enosh)다. 골고다다. 하나님을 흉내 내는 게임을 멈춰야 한다. 나는 흙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