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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침례교회와 청교도

침례교 역사-8

김용국 교수
침신대 신학과
(교회사)

엘리자베스 1세(1558~1603) 시대 성공회를 개혁하려한 청교도들은 다음과 같은 주장을 펼쳤다.


첫째, 모든 예배와 신앙행습은 성경에 근거해야 하는데, 성경에 나오는 예배는 예식서의 예전적 형식의 예배가 아니라, 성령의 임재 하에 자유롭고 살아있는 예배였다. 따라서 획일화된 예배를 생산하는 성공회의 공동기도서는 폐지돼야 한다.


둘째, 가톨릭교회의 절기들을 없애고, 대신 주일을 엄격히 성수해야 한다. 주일날 세상적인 오락과 경건치 못한 언행과 행위들은 금하고 경건하게 지켜야 한다. 셋째, 예정과 특별구속, 하나님의 언약은 성서적 진리이므로 믿어야 한다.


청교도들의 언약사상(계약사상)은 존 칼빈과 스위스 종교개혁자 하인리히 불링거(Heinrich Bullinger)로부터 기원했다. 칼빈의 언약신학은 예정론과 연계되어 있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으실 때, 아브라함의 행위가 아닌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로 언약을 맺었으며, 따라서 언약은 택한 백성의 구원을 위한 하나님이 일방적인 약속이라 하였다.


한편 불링거는 구원에 있어 인간의 반응을 필수적인 요소로 보았다. 그래서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쌍무적 계약사상을 주장했는데 즉, 하나님은 아들을 통해 화해와 축복을 주셔야 하는 책임이 있고, 인간은 믿음과 순종이라는 책임이 있다고 했다.


이러한 두 가지 언약신학의 영향으로 인해, 청교도들 가운데 예정론을 믿으면서 인간의 책임을 주장하는 경우가 있었다. 예를 들면, 윌리엄 퍼킨스(William Perkins)는 “은혜 계약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와 그의 유익을 인간에게 값없이 약속하시는 것으로 인간은 믿음으로 그리스도를 받아들이고 그의 죄들을 회개함으로 계약이 체결되는 것”이라 해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로 받지만, 그 과정에서 믿음과 회개는 인간의 의무임을 강조했다.


교회 체제에 대해 청교도 다수는 장로교주의를 원했다. 그들은 성공회의 중앙집권적 주교제도를 여러 단계의 회의가 교회를 이끌어가는 장로교주의 체제로 바꾸려 했다. 일부 청교도들은 장로교주의를 반대하고 개교회의 독립과 자치를 인정하는 회중교회주의를 성경적 교회 체제라고 주장했다.


엘리자베스 여왕은 장로교주의나 회중교회주의 모두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급격한 교회 체제의 변화로 정치적 불안이 야기되는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엘리자베스 시대 청교도들의 이상은 실현되지 못할 것이 명백해졌다.


성공회의 개혁이 어려워지면서 청교도들은 성공회에 남아서 개혁을 이어가려는 다수파와 성공회를 떠나 독자적인 교회를 세우려는 소수파로 분화됐다. 장로교주의자의 다수는 성공회에 남아 성공회를 장로교주의 교회로 바꾸려 했으나, 소수는 성공회를 탈퇴하고 독자적인 영국장로교회를 세웠다.


한편 회중교회주의자들은 개혁이 불가능한 상황에서 국교회에 남아 있는 것은 세속 권력과 타협하는 것으로 간주, 국교회를 탈퇴하고 독립교회를 세우려 했다. 회중교회 운동을 실행한 사람들은 교수형을 당하거나, 타국(네덜란드)으로 피난을 가야 했다. 그런데 회중교회주의자들보다 훨씬 혁신적인 변화를 주장하는 사람들이 나타났다. 그들은 회중주의, 개교회주의만 가지고는 신약성경의 교회를 온전히 구현하지 못한다고 보았다.


 회중주의에 신자의 침례와 종교의 자유 및 정교분리까지 더해져야 온전한 신약성경적 교회를 이룰 수 있다고 믿었는데, 그들이 곧 침례교주의자들이었다. 이러한 과정들을 통해 17세기 초 영국 분리파 청교도들은 장로교회, 회중교회, 침례교회를 세우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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