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침례교 창시자 존 스마이스-1

침례교 역사-9

김용국 교수
침신대 신학과
(교회사)

최초의 침례교회는 영국 분리파 청교도 목사 존 스마이스(John Smyth, 1570-1612)에 의해 1609년 초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서 시작됐다. 스마이스는 영국 노팅엄셔 주 스터톤리 스티플(Sturton-le-Steeple)이라는 마을에서 자작농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링컨셔 주 게인스보로(Gainsborough)의 문법학교(grammar school)를 졸업한 후, 캠브리지대학교 신학대학인 그리스도대학(Christ’s College)에서 학사(1590)와 석사(1593)를 취득했다.


스마이스는 대학 시절 프란시스 존슨(Francis Johnson) 교수의 영향으로 청교도주의가 됐다. 존슨은 청교도 사상으로 인해 1590년에 교수직을 박탈당하고 대학에서 쫓겨났다. 그는 런던에 초대교회(Ancient Church)라는 분리파 교회를 세웠는데, 그 교회는 엘리자베스 여왕의 박해를 피해 1593년에 신앙의 자유가 있는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으로 피난갔다.


스마이스는 1594년에 성공회 목사로 안수 받았고, 1594년부터 1598년까지 4년 간 모교인 그리스도대학에서 강사로 봉직했다. 당시 신학교 교수는 결혼이 금지됐으나 스마이스는 결혼을 감행했고, 그로 인해 강사직을 박탈당했다. 스마이스는 2년간 공백 기간을 보낸 후, 1600년부터 1602년까지 링컨(Lincoln)시 교사로 봉직했다.
교사는 성경과 교리를 가르치는 직책으로 시에서 급여를 받는 공직이었다.


스마이스는 성공회의 형식주의를 강하게 비판했으며, 그로 인해 교사직을 잃고 설교권도 박탈당했다. 스마이스는 게인스보로 마을로 이사 가서, 대학원 시절 독학으로 공부한 의학 지식을 활용해 생활했다.
당시 게인스보로의 성공회 교구 목사는 가끔 주일날 출타해 미사를 집례하지 않았다. 예배를 드리지 못하고 돌아가는 교인들을 안타깝게 생각한 스마이스는 한 번 예배를 인도했는데, 그것이 큰 문제가 됐다.


설교권이 없는 사람이 설교하고 예배를 인도하는 것은 불법이기 때문이다. 행정관으로부터 심한 질책과 엄한 경고를 받은 스마이스는 국교회가 제도일 뿐 영적인 교회가 아님을 확신하게 됐다. 그는 오랜 고민 끝에 1606년 성공회를 떠나 독립교회를 세웠다.


스마이스가 세운 게인스보로교회는 급속히 성장했다. 당시에 독립교회로 모이는 것은 불법으로 많은 사람들이 한 곳에 모이는 것은 위험한 일이었다. 그래서 교회는 두 교회로 나누기로 하고, 스마이스와 토마스 헬위스(Thomas Helwys)가 이끄는 교회는 게인스보로 마을 회관에서 모이고, 존 로빈슨(John Robinson), 윌리엄 브루스터(William Brewster), 윌리엄 브래드포드(William Bradford) 등이 이끄는 교회는 스크루비 마을의 저택(Scrooby Manor House)에서 모이기로 했다. 이 교회는 스크루비교회로 불렸다.


당시 영국 왕 제임스 Ⅰ세는 분리파들은 영국을 떠나야 하며 그렇지 않으면 투옥될 것이라 했다. 게인스보로교회는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으로 1607년에 갔고, 스크루비교회는 1608년 봄에 갔다. 스크루비 교인들은 네덜란드에서 12년을 머문 후 1620년에 메이플라워(Mayflower)호를 타고 미국으로 건너가 청교도 개척자들(Pilgrim Fathers)이 됐다.


게인스보로교회는 암스테르담에서 워터랜더 메노파교회(Waterlander Mennonite Church)의 성도, 얀 문터(Jan Munter)가 빵가게로 사용하던 2층짜리 건물을 임대해 집단적으로 거주했다.
암스테르담에는 스마이스의 스승이었던 존슨이 담임목사로 있는 초대교회가 먼저 와 있었다.


스마이스 무리는 초대교회와 통합을 검토했으나 그렇게 하지 않기로 했다. 그 이유는 목회직, 예배, 교회정치, 재정 등 네 가지 부분에서 견해가 달랐기 때문이다. 초대교회는 목회직으로 목사와 교사를 뒀으나, 게인스보로교회는 목사만 인정했다. 초대교회는 설교를 위해 사본으로 된 성경을 사용했으나, 게인스보로교회는 공동기도서 사용에 대한 반대를 뛰어넘어, 설교도 성령의 인도를 받기 위해 미리 준비하지 않고 즉흥적으로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초대교회는 목사, 교사, 치리장로로 구성되는 장로회를 주장했으나, 게인스보로교회는 에베소서 4장 11절을 근거로 모든 영적인 직분은 하나이며, 따라서 교회 직분은 영적 직분인 목사와 봉사 직분인 집사만 가능하다고 했다. 초대교회는 교인이 아닌 외부인들로부터 후원금을 받고, 헌금을 기도 없이 걷지만, 게인스보로교회는 교인의 헌금만으로 교회가 운영돼야 하고, 헌금은 기도를 통해 거룩하게 해야 한다고 믿었다.


이처럼 게인스보로교회의 초기 모습은 장로교주의를 반대하고 성령의 영감을 강조하는 영성주의적인 면을 가지고 있었다. 이 교회는 1609년 초에 침례교회가 됐는데, 이에 관한 내용은 다음 호에서 살펴볼 것이다.



총회

더보기
“예수 다시 사셨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그의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벧전 1:3) 2024년 부활절을 맞이하여 3500침례교회와 목회 동역자. 성도들 위에 그리스도의 부활의 생명과 기쁨과 회복의 은총이 충만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우리가 죄인으로 영원한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는 존재에서 예수님의 죽으심과 다시 살아나심으로 영원한 생명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역사적인 순간입니다. 이 부활의 기쁨과 감격이 없다면 우리는 아무것도 아닌 존재입니다. 이 땅의 창조주이신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에 직접 주관하시고 인도하시며 이제는 구원의 완성으로 진정한 하나님 나라의 백성을 몸소 가르치시고 보여주시기 위해 그의 아들을 보내주신 사실을 믿고 기억해야 합니다. 그 분은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셨고 가르치셨으며 가난한 자, 병든 자, 소외된 자, 고난 받는 자를 치유하시고 회복시키셨습니다. 그 회복을 통해 우리는 이 땅에 믿음의 공동체를 세웠습니다. 그 공동체의 핵심은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과 부활의 놀라운 소식입니다. 이 소식이 복음의 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