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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죽어야 네가 산다

 

자신의 중독적이고 강박적 행동이 무엇이었든 자신이 그것에 무력했음을 깨닫고 시인하므로 자신의 부족, 즉 수치심을 끌어안지 않으면 내면화된 수치심이 중독적인 성향으로 나타나 절대적이고 완벽주의적인 성격을 띤다. 사람들에게 실수 없는 완전한 사람으로 인식시키며 자신이 대단하다고 여기는데 그 뿌리가 수치심에서 만들어 진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한다.

 

수치심은 모든 감정을 오염시키고 결국 남은 것은 거짓자아로 형성된 의지력뿐이다. 이러한 의지력으로 추구하게 되는 것이 자신이 하나님처럼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하나님처럼 되는 목사와 함께 있는 성도들도 상호의존중독에 걸렸다고 본다. 목사는 강박적 완벽함으로 자신의 수치심을 가리어 하나님처럼 되려하고 성도는 목사를 눈에 보이는 하나님으로 만들어 허물어진 자기경계를 완전한 목사로 대치하여 의존하게 된다.

 

자신의 경계와 타인의 경계를 지키면서 하나 되는 방법이 서로 사랑하는 것이다. 아버지가 아들을 사랑함으로 아들이 사랑하는 아버지가 되는 것이다. 바울은 나는 날마다 죽노라로 고백을 한다. 이만큼 이루신 분도 주님이시오, 나의 부족을 채워 가실 분도 주님이시란 고백이다. 남편이 머리요 아내는 몸임을 강조하는 남편은 수치심이 많은 사람일 가능성이 많다.

 

죄의 결과로 세상은 역기능이기에 먼저 그리스도의 본질의 사랑이 충만한 아내나 자녀에 의해서 아버지가 치유 받을 수도 있다. 이것을 부끄러워해서는 안 된다. 그러므로 아버지는 자신의 부족을 인정하고 아내나 자녀에게 용서를 구 할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이 피차 그리스도께 복종하는 모습이 되는 것이다.

 

요즈음 3D프린터가 나왔다. 사람의 두개골도 가루를 이용하여 작은 층들을 쌓으므로 정밀하게 두개골을 3차원으로 복제해 낸다. 그러나 아무리 복제해도 그것은 가짜다. 나는 그 복제품이 역기능이라 말하고 싶다.

 

역기능의 가족은 그 체계를 외부에서 보았을 때 아주 완벽하게 돌아가는 것처럼 보이는 경우가 많다. 그 가족 체계 내에서도 완벽하다고 믿고 있다. 그러나 세대를 거듭하며 상처의 대물림으로 역기능은 반복된다. 조부모 세대의 죽음으로 이제 부모가 조부모가 되고 자녀가 부모세대가 된다.

 

자녀가 결혼을 하면 부모 곁을 떠나 부모와 같은 레벨이 된다. 그러나 노년의 부모는 결혼한 자녀의 부족한 모습을 보며 여전히 자신의 자녀라고 볼 뿐 이제 그들 스스로 독립한 같은 레벨의 인격체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 이것이 자녀의 부부 사이를 깨는 선악과가 되는 것이다.

 

역기능에서의 죽음은 순기능에서의 생명이다. 역기능의 세상에서는 사랑이라는 이름을 통하여 낮아져야 한다. 이것이 순기능에서의 높아짐이다. 사랑하지 못하고 낮아지는 것은 굴종이고 사랑을 통하여 낮아지는 것은 온전한 인격으로 자신이 선택하는 순복이다. 그래서 사랑이 없으면 세상에서 살기 위해 높아지려고 한다. 세상에서 높아질수록 관계가 깨지는 역기능이 강화된다.

 

부모는 자녀의 교육에서 자녀가 형성하고 있는 자존감의 그릇 만큼 그 크기에 맞추어서 영적 음식을 내놓을 수 있는 지혜가 필요하다. 그러나 부모 자신이 사랑받지 못하고 치유 받지 못한 성인아이라면 자녀에게 사랑을 공급 할 수도 없을 뿐만 아니라 자녀의 자존감의 크기를 파악하기란 여간 어렵지 않다. 이런 경우 공식처럼 부모는 자녀가 결혼한 경우 자녀의 부부가 일순위라는 사실을 알고 경계선을 지켜줘야 하는 것이다.

 

노년의 부모는 결혼한 자녀의 부족한 모습을 자녀를 위한다는 명분으로 간섭을 하는데, 그것을 참아야 한다. 그리고 문제가 있어도 아들과 며느리가 서로 한 몸으로서 살 수 있도록 우선순위를 양보해야 한다. 그 경계를 무너뜨리는 순간 가족의 역기능이 강화되어 이혼에 이르기 쉽다. 그렇게 되면 엄마(심리적인 아들의 대리아내)는 이혼한 아들(심리적인 엄마의 대리남편)과 다시 같이 살게 된다. 그리고 그 아들부부 사이에서 난 자녀가 상처를 안고 자라서 부모의 역기능을 대물림하게 되고 역기능은 오히려 강화된다.

 

가정의 체계를 교회로 바꾸어서 생각해 보자. ()교회에서 지()교회가 형성되었는데 본교회의 큰 목사님은 지교회의 부족한 모습 때문에 지교회의 작은 목사를 같은 동격의 레벨이 아닌 여전히 본교회에 있을 때 목자와 양의 관계로 인식한다면 이것이 역기능이다.

 

어떤 경우는 지교회의 목사가 부족하다는 이유로 본교회 목사님이 해임 시키는 경우도 있다. 지 교회 성도들은 이 속에서 큰 목사와 작은 목사 사이에 이중 메시지를 경험하며 무의식적 자신의 생존전략으로 큰 목사를 따르게 된다.

 

여기에 합당한 이유를 내세우는데 지교회목사가 목사로서 많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결혼한 자녀나 자녀의 배우자가 부족하다고 그들 사이를 가르지 말아야 한다. 물론 자녀 부부사이에 목숨이 위태로운 극한의 갈등상황인 경우는 예외일 수 있다. 그러지 않고는 자녀부부의 일에 개입을 해서는 안 된다.

 

부모가 내가 아니면 안 돼라는 생각을 버리고 부모가 죽어야 자녀가 산다. 내가 죽어 네가 사는 것이 사랑이기에 그렇다.

 

박종화 목사

빛과 사랑의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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