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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래와 음악으로 풀어보는 성경이야기(269)

주님을 향한 사랑의 노래

 

 

찬양은 불러주시고 은혜주신 주님을 향하여 믿음을 고백하며 표현하는 것이다. 믿음을 고백하며 표현하는 방식에는 제한이 없다. 노래, 악기, , 선행, 그림, 조각을 포함한 그 어떠한 방식도, 주님께서 주신 믿음을 고백하며 주님의 영광을 드러낼 수 있다면 모두 찬양이 될 수 있다.

 

A. Nygren에 의하면 믿음의 핵심은 주님사랑이다. 찬양이 믿음의 고백이자 표현이고, 믿음은 주님사랑이므로 찬양은 주님께 사랑을 고백하며 표현하는 것이 된다.

 

Wes. Sutton이 작사 작곡한 유명한 찬송가, “나 무엇과도 주님을 바꾸지 않으리, 다른 어떤 은혜 구하지 않으리, 오직 주님만이 내 삶의 도움이시니, 주의 얼굴 뵙기 원합니다, 주님 사랑해요 온 맘과 정성 다해, 하나님의 신실한 친구 되기 원합니다는 주님께 고백하는 찬양자의 뜨거운 마음과 사랑을 잘 표현하고 있다. 단순하면서도 정갈한 이 찬송시가 로맨틱한 선율과 하나로 잘 엮어져서 주님과 영적으로 연애하는 분위기를 더욱 아름답게 승화시키고 있다.

 

평생에 걸쳐 찬양하며, 세상에서 가장 열정적으로 주님께 사랑을 고백한 사람은 다윗이다. 그의 노래가 시편의 150개의 찬송시들 중에서 거의 절반을 차지할 정도이니, 시편에 실리지 않은 것까지 포함한다면, 그의 찬양에 대한 뜨거운 열정과 재능을 가늠하는 과정만 해도 만만치 않은 작업이 될 것이다.

 

주님을 향한 그의 사랑의 노래는 선지자 나단을 만났을 때에도 계속된다. “볼지어다, 나는 백향목 궁에 살거늘, 하나님의 궤는 휘장 가운데에 있도다”(삼하7:2). 법궤가 안치된 성막의 초라함에 비교해 볼 때 자신의 궁전이 너무 화려해서 송구스럽다는 사랑과 믿음의 표현이다.

 

다윗은 두로왕 히람이 세워준 화려하고 멋진 백향목 궁전에 거하면 거할수록 외형적으로 소박하다 못해 초라한 여호와 하나님의 성막이 못내 아쉬웠던 것이다. 물론 성막과 법궤가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으로서 주님께서 그 안에만 거하시는 것은 아니다. 주님께서 무소부재하시며 온 우주에 편만하신 창조주이심을, 온 우주가 다 주님의 처소임을 그 역시 몰랐겠는가?

 

하지만 다윗이 누군가?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인 법궤와 성막에 큰 애정을 기울였던 자가 아닌가? 아무리 상징적인 법궤라 할지라도, 아무리 상징적인 성막이라 할지라도, 세상 사람들은 법궤나 성막을 바라보며 당연히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생각을 떠올릴 것이라는 판단에 마음이 편치 않았을 것이다.

 

게다가 백향목으로 지어진 화려한 왕궁과 그 옆에 천 조각이나 가죽으로 덮여있는 초라한 성막의 극명한 대비는 항상 하나님을 찬양하고자 했던 그의 열정 및 하나님우선의 신앙인격과는 사뭇 어울리지 않는 비찬양의 가책으로 통하는 부작위였을 것이다.

 

노래와 춤과 회화가 찬양의 자료가 될 수 있다면, 건축 역시 찬양자의 믿음을 고백하며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수 있는 중요한 자료가 될 수 있다는 다윗의 판단은 자신의 왕궁보다 훨씬 더 화려한 하나님의 성전을 건축하려는 거룩한 의지로 승화되었으리라.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다윗의 뜻을 받아들이지 않으셨다. 누구보다도 다윗의 마음을 잘 알고 계셨던 분이지만 성전건축을 허락지 않으셨던 것이다. 대신 그에게 엄청난 축복을 약속하신다.

 

첫 번째로, 다윗의 이름을 위대한 이름으로 만들어 주시겠다는 언약이다(7:9). 두 번째로, 국가의 안정과 평화에 대한 언약이다(7:11). 세 번째로, 다윗의 아들에게 성전건축의 권한을 주시겠다는 언약이다(7:13). 네 번째로, 다윗왕조가 영원하리라는 언약이다. 보통 사람들은 큰 권력이나 명예나 재산을 얻으면 교만해져서 우선적으로 자신의 부귀영화와 안락함에 집착한다.

 

그러나 다윗은 고대근동을 포함한 광대한 중동지역의 맹주로 부상했음에도 불구하고 신앙과 인격적인 면에서 결코 변질되지 않았다. 어떠한 상황에 처하더라도 자신을 택하시고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사랑과 배려를 잊지 않았다. 비록 성전건축의 권한은 허락지 않으셨지만, 다른 엄청난 복으로 다윗의 사랑의 노래에 응답하신 하나님의 은혜는 심은대로 거둔다는 성경의 법칙을 다시 한 번 증명하고 있다.

 

노주하 목사 / 대연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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