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께서는 택한 백성 들의 이름에 대해서 관여와 배려해주심이 있다.
사가랴의 아들 이름을 천사를 통해서 “요한”으로 미리 알려주셨는가 하면(눅 1:13) “고귀한 아버지”란 뜻의 아브람의 이름을 더 크고 위대한 ‘열국의 아버지’ 란 뜻의 아브라함으로 바꿔 주시기도 했다(창17:5).
또한 개인적으로 특별히 이름을 불러주신 사례들도 있다. 호렙산 근처에서 불이 붙었으나 타지 않는 떨기나무를 보러간 모세나 실로에 있는 여호와의 집에서 봉사하던 사무엘을 밤중에 각각 부르시고는 사명 이나 장차 될 일을 말씀해주셨다(출3:4, 삼상3:10).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의 이름을 기억하시며, 불러 주시며, 다윗처럼 존귀하게 만들어주시기도 한다(대상17:8).
사람들은 누구나 자기 이름을 귀중히 여긴다.
이름은 그 사람의 성격, 지위, 업적, 생애 등을 반영하는 것으로 ‘호랑이는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는 속담이 있을 정도로 후세까지 명예롭게 되길 바란다.
그렇기에 목회자들도 교인들의 이름을 잘 기억하며 불러 주어야 한다.
나의 경우엔 대심방시 교인 자녀들의 이름을 갑자기 잊어버려 당황했던 경험이 있다.
몇 번 이런 일을 겪은 후엔 메모지에 이름을 적어서 사용했는데 그것은 교인들에게 섭섭함이나 오해할 소지를 주지 않기 위함이었다.
교인을 통해서 실소(失笑)케 하는 이런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이웃교회 담임 목회자가 심방을 가서 기도하는 중에 교인의 이름이 생각나질 않았다. 이럴땐 적당히 넘길 수도 있음에도 불구하고 기도하는 것을 멈추고는 황당하게 “니 이름이 뭣이고?”하고 반말로 묻더라는 것이었다. 그 교인은 권사로 70살 가까운 나이에 담임 목회자보다 몇 살 위였다. 이것은 당연히 고의적인 무례를 범했거나 상처를 주는 실수라고 여겨진다.
그런데 심방을 마친 후 깐깐한 성격의 그 교인이 웬일인지 배를 움켜잡고 웃었을 뿐더러 담임 목회자 에게 더 친근감을 갖게 됐다고 말하더란다.
교회공동체는 자주 모임을 가지는데 여기서는 예의와 존중함이 필요하다. 그래야만 회원 상호간에 좋 은 관계가 오랫동안 지속될 수 있다. 무례한 언행은 타인에게 자존심을 상하게 하거나 상처를 주며, 심지어는 교회를 떠나게 만든다. 하지만 타인의 실수나 잘못함을 용납할 수도 있어야 된다. 베드로가 예수님께 질문했다.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까?”, 예수님은 “네게 이르노니 일곱 번 뿐만 아니라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도 할지니라”(마18:22)고 끝없는 용서와 무제한 적인 사랑을 대답해 주셨다.
교회공동체는 예의와 절제와 존중함이 반드시 있어야 된다.
그리고 긍휼과 용서와 관용이 더해져야 한다. 긴장과 경계함, 정죄와 비판만 있는 곳엔 분위기가 냉랭하고 살벌하게 될 수 있다. 기도하는 가운데 “니 이름이 뭣이고?”하는 말을 듣고도 웃고 친근감까지 가졌다는 교인이 있는 그들의 교회는 훈훈함과 여유로움이 있다는 얘기까지 들었다.
로마서 12장 10절엔 “형제를 사랑하여 서로 우애하고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하며”란 말씀이 있는가 하면, 디도서 3장 2절엔 “아무도 훼방하지 말며 다투지 말며 관용하며 범사에 온유함으로 모든 사람에게 나타낼 것을 기억하게 하라”는 말씀도 있다.
김원남 목사
양광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