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다윗의 애가 (삼하1:1~27)

이희우 목사의 사무엘서 여행-28

이희우 목사

신기중앙교회

 

원래 한 권이던 사무엘서, 두루마리의 길이가 너무 길어서 인위적으로 두 권으로 나눈 것 같다. 나누는 기점은 사울의 죽음, 사무엘상이 사울과 다윗의 경쟁을 다뤘다면 사무엘하는 다윗이 주인공이 되어 통일왕국을 이루는 과정을 다룬다.

 

사무엘하의 1장부터 8장까지는 다윗 제국이 성장하고 발전하는 모습을 다루고, 9장부터 20장까지는 왕위 계승자를 찾기 위해 다윗의 여러 후계자들을 걸러내는 광범위한 주제를 다루며, 21장부터 24장은 부록이다.

 

본문은 다윗의 새 시대를 여는 첫 사건, 사울의 죽음으로부터 다윗의 시대가 시작 된다. 이 첫 사건을 다루는 다윗의 모습을 보면 그의 성품이 잘 드러난다.

 

사울이 죽었다는 소식을 접한 다윗

시글락으로 돌아온 지 사흘 만에 다윗을 찾아온 한 청년(2절), 그는 사울과 요나단이 죽었다는 비보를 전한다(4절). 그런데 그의 보고가 사울이 자살했다(31:4)고 한 삼상 31장과는 좀 다르다. 그 청년은 살 가능성이 없어서 자기가 죽였다며(10절) 사울의 왕관과 팔에 있는 고리까지 증거로 제시했다.

 

그러나 성경은 부연 설명은 없지만 이 청년이 거짓말한 것으로 다룬다. 사울과 다윗의 관계를 알고 자기 공을 내세우기 위한 거짓말로 본 것이다.

 

이미 사무엘상 31장에서 언급했기에 더이상 그럴 필요가 없어서 그랬는지 아니면 실제 그랬을 가능성을 열어둔 것인지는 알 수 없다. 다만 다윗은 사울왕이 죽었다는 낭보 같은 비보를 이 청년에게서 처음 들었다.

 

유일한 정보다. 그런데 다윗을 보라. 정적 사울을 죽였다는 청년에게 감사나 칭찬을 하거나 기뻐하기는커녕 크게 슬퍼하고 울며 금식한다(11절).

 

다윗은 먼저 ‘여호와의 백성’이라며 하나 님을 생각했고, ‘이스라엘 족속’이라며 이스 라엘 민족을 생각했다. 믿기 어려울 정도로 낭보로 여기는 마음이 단 1도 보이지 않는다. 그저 이스라엘을 지키던 왕의 죽음과 여호와의 백성들, 이스라엘 족속이 죽은 비보 로만 여긴다. 그의 애가를 봐도 이스라엘을 지키던 용사들의 죽음에 대한 애도뿐이다.

 

애통하는 자에게 복이 있다고 했던가? 다윗은 복을 받는다. 이게 대인배와 소인배의 차이, 눈앞에 있는 이익만 추구하는 자와 나라와 대의라는 더 큰 그림을 그리는 자의 차이일 것이다.

다윗은 언제나 하나님의 뜻과 선택을 중요하게 생각했다.

 

그래서 도피생활 중에도 사울을 하나님이 자신의 계획 가운데 세운 왕으로 여겼었다. 그래서 누구든 인간이 이를 저지할 수 없고 해서도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하나님께 맡기고 죽일 기회가 주어져도 그렇게 하지 않았다.

 

하나님의 기름부으심을 기억한 것, 놀라운 것은 다윗이 하나님을 그렇게 존중하니 하나님도 다윗을 높여주셨다는 것이다. 반면에 하나님의 선택을 우습게 여기고 사울을 죽였다는 아말렉 청년에게는 죽음이 주어졌다(15절).

 

다윗이 그토록 슬퍼했던 또 다른 이유는정 때문이다. 요나단은 사랑했기에 정들었 고, 사울은 미워하면서 정들었다. 고운 정도 정이고 미운 정도 정 아닌가? 자기를 지탱 해오던 한 축이 무너진 듯 애가로 그 사랑을 전한다. 꼬인 것을 다 푼다. 풀어야 한이 남지 않기 때문이다.

 

사울을 위한 애가

17절 이하는 사울과 요나단의 죽음을 슬퍼하는 다윗의 애가이다. 18절에 보면 ‘활의 노래’라는 이름이 붙었다. 악기가 없던 시절 활을 악기 삼아 노래를 불렀던 모양이다.

 

내용은 전적으로 사울과 요나단의 죽음을 애도하는 것, 다윗은 그 산 위에서 이스라엘의 영광까지도 죽임을 당했다며 고통스러워한다(19절). 그리고 “오호라 두 용사가 엎드러졌도다” 이 탄식을 25절과 27절에서 세 번이나 반복한다. 통곡한 것이다. 사울 때문에 망명까지 갔던 자가 어떻게 이럴 수 있을까? 시편 곳곳에 보면 사울이 빨리 죽었으면 좋겠다는 마음도 있었던 것 같다.

 

대적자 대신 사울의 이름을 넣으면 이해되는 구절들이 꽤 많다. 그러나 막상 사울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다윗은 그의 죽음을 기뻐하지 않는다. 쇼가 아니다. “네 원수가 넘어질 때에 즐거워하지 말며 그가 엎드러질 때에 마음에 기뻐하지 말라”(잠24:17)는 말씀 때문일까? 아니면 사울이 이방인인 블레셋 군대에 의해서 조롱받으며 죽임을 당했기 때문일까? 다윗은 사울 왕과 요나 단의 몰락을 이스라엘 왕국의 파괴로 받아 들였던 것 같다.

 

사울의 죽음에 대한 다윗의 이 애도가 슬픔에 빠진 이스라엘 백성이나 베냐민 지파의 아픔을 달랜다. 통합된 이스라엘을 만드는 결정적 정서, 철학용어로는 파토스 (Pathos, 청중의 감성에 호소하는 것)를 만들어낸다.

 

‘우리는 하나다. 당신의 죽음이 너무 슬프다.’ 이런 파토스가 이스라엘을 하나로 만든다. 치유와 회복의 역사가 나타난 것이다. 훗날 남왕국과 북왕국으로 갈릴 때 다윗의 유다 족속과 함께 했던 지파가 사울의 베냐민 지파였다. 견원지간이었는데 장례식 치른 다음에 하나가 된 것, 다윗의 애가가 이스라엘을 한 나라 되게 한 것이다.

 

다윗은 그렇지 않다. 아파한다. 이게 다윗의 성품, 다윗의 인간됨이다. 다윗은 사울의 과거를 들추지 않았고, 단점을 말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용장이었다며 아름다웠다고 한다(22~23절). 재미있는 것은 다윗은 그들의 용맹함을 찬양하는데 성경은 집요하게 사울의 실패를 지적한다는 것이다. 사울 또한 40년이라는 오랜 세월 왕좌의 자리에 있으며 이스라엘을 지켰는데 사울에 대한 평가는 너무 인색하다는 느낌이 들 정도다.

 

물론 사울의 실패로 인식되는 대표적인 사건들이 있었다. 크게 두 가지, 하나는 사무엘상 13장에 나오는 제사장을 대신하여 번제 드린 사건이다. 블레셋과 싸울 때 사무엘이 제때 오지 않자 다급한 나머지 사울이 제사장 역할을 한 월권, 사울은 이때 사무엘 에게 심한 책망을 들었다. 그런데 다윗은 안그랬나? 사무엘상 30장에 보면 아말렉과 싸우러 갈 때 다윗도 자신이 제사장 행세를 했다(삼상30:7~8). 동일한 행위인 것 같은데 사울에게는 중죄가 되고 다윗에게는 죄가 되지 않는다. 마치 하나님의 차별이자 기소권 남용처럼 보인다.

 

다른 하나는 아말렉과 그 소유물을 진멸 하라는 명령을 어기고 귀중한 일부 소유물 들을 빼돌렸다는 죄다. 그런데 삼상 30장에 보면 다윗도 아말렉을 치면서 그들의 소유를 진멸하지 않고 전리품으로 다 소유하였다.

 

심지어 13개 유다 성읍에 전리품을 선물로 보냈다. 아말렉에게 행한 행동은 다르지 않은데 사울에게는 죄가 되고 다윗에게는 칭송이 따른다. 편파적 아닌가?

 

그러나 성경이 죄라면 죄다. 성경은 하나의 사건을 보는 게 아니라 사울 인생의 전반적 태도를 본 것이다. 핵심은 사울이 전적으로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그때그때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았다는 것, 자기 생각대로 한 것이 사울을 실패로 이끈 것이다.

 

이스라엘의 부와 안정이 사울로부터 왔고 사울은 그런 면에서는 하나님의 충실한 도구요 아름다운 삶을 살았다는 것, 다윗은 사울의 단점은 감추고 그의 장점을 부각시킨다. 이것이 슬픔을 나눈 다윗의 애가다. 훌륭하다. 위대하다. 마지막에 아름다운 찬가를 들을 자격이 충분하다.

 

요나단을 위한 애가

다윗의 애가에서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그의 참된 벗 요나단을 위한 애가다. 다윗은 요나단의 죽음이 너무 슬펐다.

 

요나단을 멋진 남자, 용맹한 남자, 매력적인 남자라고 표현한다(26절). 정현종님의 표현대로 ‘모든 순간이 다 꽃봉오리인 것을’ 그런 느낌일까? 남자 간의 이 진한 사랑, 당연히 동성애에 대한 찬양은 아니다. 다윗은 극진한 우정으로 요나단의 죽음을 애도하고 있다.

 

탈무드에 보면 어떤 사람이 왕으로부터 호출을 받자 왜 호출당했는지 몰라 불안해서 세 친구에게 함께 동행할 것을 요청한다.

 

첫 번째 친구는 가장 소중히 생각해왔던 친구였지만 일언지하에 거절당한다. 두 번째 친구는 사랑은 하고 있었지만 첫 번째 친구만큼 소중하게 생각하지는 않았던 친구였는데 궁궐 앞까지만 동행하겠다고 한다.

 

세번째 친구는 별로 소중하게 여기지 않았던 사람, 그런데 이 친구는 요청을 받자 왕의 앞까지 같이 가서 자기가 변호해주겠다고 한다. 탈무드는 첫 번째 친구는 재산이고, 두 번째 친구는 친지이고, 세 번째 친구는 선행이라 했다.

 

그리고 왕의 호출은 죽음, 죽음의 소식에 재산은 즉시 떠나고, 가족은 장례식까지만 동행하지만 하나님 앞까지 영원히 남는 것은 선행뿐이라는 교훈이다.

 

요나단을 위한 애가, 이는 사랑이자 선행이다. 우리도 멋진 애가의 한 소절을 만들기 위해 달려가야 한다. 하나님은 우리 모두에게 활을 주셨다. 이 활을 멀리 정확히 쏘아 보내야 한다. 칭송받는 영원한 용사의 활로 남아야 한다.



총회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