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한글성경이 우리 손에 오기까지(3)

한글성경이 우리 손에 오기까지(3)
백정수 목사
더가까운교회

중국에서 존 로스가 들었던 뜻밖의 비보는 ‘로버트 저메인 토마스 선교사’가 사망한 것이다. 로버트 저메인 토마스! 일명 토마스 선교사는 누구인가? 그는 조선 최초의 개신교 선교사이자, 또 개신교 선교사 중 최초의 순교자라고 알려져 있다. 


이 말은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 많은 사람들이 왜 그리 최초에 의미를 두고 연연한지 모르겠지만, 상식이라는 측면에서 각각 최초들이 누구인지를 살펴보도록 하겠다. 


먼저 조선 최초의 선교사라고 하면, 조선 땅을 처음 밟은 선교사를 의미한다. 토마스 선교사는 1866년 제너럴셔먼호를 통해 선교사 최초로 평양에 왔다고 알려져 있는데, 사실 그는 이보다 1년 전인 1865년에, 스코틀랜드성서공회의 지원으로 연평도에 온 적이 있다. 그러나 세간에 알려진 대로 그가 최초의 개신교 선교사는 아니다. 왜냐하면 이미 1832년에 충청남도 보령시에 속한 ‘고대도’라는 섬에서 복음 사역을 했던 독일인 개신교 선교사가 있기 때문이다. 그가 ‘칼 귀츨라프’ 선교사다.


귀츨라프는 ‘고대도’ 도민들에게 성경에 나오는 주기도문을 한문으로 써주고, 이것을 다시 한글로 번역하는 작업을 했다. 물론 이것이 한글 성경 전체의 번역을 한 것이 아니지만, 비록 단편적일지라도 한글 성경 번역의 효시라 불릴 만한 일로 여겨진다. 또한 그는 당시 먹을거리가 없는 곤궁한 조선인들을 위해 서양 감자를 재배하는 법과, 야생 포도로 음료를 만드는 법을 기록으로 남겨 전수했다. 귀츨라프는 의사였기에, 본국에서 가지고 온 약을 약 60명의 연로한 감기 환자들을 위해 처방했는데(1832년 8월 2일 귀츨라프 조선 항해기), 이것은 조선에서 서양 선교사가 최초의 서양 의술을 베푼 기록이기도 하다. 따라서 조선 최초의 선교사는 토마스 선교사가 아닌, 칼 귀츨라프 선교사임을 확실히 외워두자. 타교단 목사는 몰라도 침례교 목사라면, 이 정도의 상식은 여유 있게 지니고 있어야 한다.


그 다음으로, 조선 최초의 개신교 순교자는 ‘로버트 저메인 토마스’가 맞다. 그는 일찍이 해외 선교에 뜻을 뒀으며, 영국 런던대학교 뉴 칼리지에서 신학을 공부하고, 목사 안수를 받았다. 그러나 토마스는 목회보다는 해외 선교 사역에 뜻을 두었으며, 런던 선교회(London Missionary Society, LMS)에서 파송을 받아 부인인 캐롤라인과 함께 중국 상해로 떠났다. 몇 달간의 긴 항해 끝에 마침내 상해에 도착했는데, 그들이 상해에 도착한 때는 한창 매서운 추위가 몰아치던 1863년 12월이었다. 중국 상해의 기후는 임신 초기인 아내 캐롤라인에게 전혀 맞지 않았다. 그로 인해 점점 쇠약해지는 그녀였지만, 이들 부부는 현지에 곧 적응할 것이라고 여기며 대수롭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토마스 선교사가 인근 지역으로 며칠간 출장을 마치고 돌아와 보니, 너무나 안타깝게도 그의 아내 ‘캐롤라인’이 유산을 하고서 과다출혈로 홀로 죽어 있었다. 더구나 시신은 사망한 지 일주일도 더 지난 상태였다. 


아내의 시신을 본, 토마스 선교사는 그 자리에 주저앉아 대성통곡을 했다. 엄청난 충격과 고통, 슬픔이 그를 잠식했으며, 이 비극적인 때는 그가 상해에 온 지 약 4개월도 안 된 시점이었다. 자포자기 상태가 된 그는 1864년 4월 5일 자로 소속된 런던선교회에 첫 편지를 보내게 되는데, 원래는 선교 보고서가 되어야 할 편지가 아내의 사망 보고서가 됐던 것이다.

 

“내가 죄를 지은 것도 아니고 선교하러 왔는데…. 선교회에 보내는 처음 편지가 이런 것이 될 줄은 몰랐습니다. 내 사랑하는 아내 캐롤라인이 지난달 24일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더 이상 눈물이 나 글을 써 내려가지 못하겠습니다….”

 

이 편지는 런던선교회에 보내는 토마스 선교사의 처음이자 마지막 ‘선교보고’였다. 아내를 잃고 힘들어하는 토마스 선교사를 위로하고 격려하는, 가슴이 따뜻한 동료 선교사들도 있었지만, 반대로 런던선교회의 상해 책임자인 ‘무아헤드’와 같은 일부 사람들은 그의 아픔을 충분히 공감하지 못했다. 오히려 아픔의 시기를 겪고 있는 토마스 선교사에게 사역을 촉구하며, 사역의 결과만을 요구하는 인정머리 없는 태도를 보였다. 그로 인한 갈등과 마찰로 인해 토마스는 오랜 고민 끝에 선교사 직분을 사임하게 된다. 
<계속>



총회

더보기
30년의 유산을 넘어 다시 희망의 깃발을 듭시다!
존경하는 침례교 동역자 여러분! 그리고 전국의 3500여 교회 성도 여러분. 주님의 이름으로 평안을 전합니다. 저는 교단의 내일을 가늠할 중요한 길목에서, 우리가 걸어온 길과 걸어가야 할 길에 대해 나누고자 합니다. 역사는 기억하는 자에게 미래를 열어준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지금, 30년 전 우리 선배들이 눈물로 심었던 그 거룩한 씨앗을 기억해야 합니다. 30년 전, 우리에게는 ‘거룩한 야성’이 있었습니다. 바로 ‘3000교회 100만 성도 운동’이었습니다. 그 시절 우리가 외쳤던 구호는 단순한 숫자 놀음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침례교회가 한국 교회의 희망이 되겠다”는 당찬 선언이었으며, 복음의 능력으로 시대를 돌파하겠다는 영적 결기였습니다. 그 뜨거운 구령의 열정이 있었기에 우리 교단은 한국 교회사에 부흥의 이정표를 세울 수 있었습니다. 그 열정의 거룩한 불씨는 꺼지지 않고 이어져 왔습니다. 우리는 104차 총회에서 ‘부흥협력단’이라는 아름다운 동역의 저력을 통해, 개교회주의를 넘어 ‘함께하는 부흥 목회’의 가치를 배웠습니다. 서로가 서로의 울타리가 되어주고, 강한 자가 약한 자를 담당하며 우리는 ‘상생’이라는 침례교만의 독특한 저력을 확인했습니다. 이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