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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순절 성령강림 사건

오순절 성령운동의 이해 - 22
김한순 목사
홍성성산교회

그러기에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은 구속사(Heilsgeschichte)속에서 그리스도의 탄생에 버금가는 중요한 의미를 지닌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그런데 오순절에 성령을 보내신 분은 그리스도이시다(행 2:33). 그리고 침례요한은 물로 침례를 주던 자기와 대조시켜 그리스도를 “성령으로 침례를 주시는 이”로 묘사한 바 있다(요 1:33). 그런데 이 예언은 오순절에 내린 성령강림 사건을 통하여 성취됐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그리스도를 믿고 영접하는 순간 성령으로 침례를 받으며, 그리스도의 삶 속에서 성령의 충만을 경험하게 된다(고전 12:13, 엡 3:16~19).


나아가 이순한 목사는 오순절 날에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와 불의 혀 같이 갈라지는 것”이 보였던 것은 성령강림의 양상이 객관적인 사건으로 나타난 일이며, 주님의 약속을 기다리며 기도하다가 아무도 예측할 수 없는 시간에 임하셨고, 또한 성령충만을 받은 제자들까지도 놀랄 정도로 예기치 못한 때에 임하셨음을 보여준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그는 여기에 나오는 “바람”이나 “불”은 신구약에서 공히 성령을 표현하는 어휘들이기 때문에, 혹시라도 예수께서 니고데모에게 말한 바 중생을 바람에 비유하신 것을 근거로 어떤 주석가들이 이 오순절 성령강림은 중생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해석한 것은 잘못된 것이라 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제자들은 이미 중생한 자들이기 때문에, 도리어 여기서는 중생을 전제로 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이 충만하게 임하시면 제자들이 권능을 받고 땅 끝까지 이르러 주님의 중인이 돼야 한다는 것을 전제로 하기 때문이라 했다. 나아가 그는 사도행전 1장 5절 말씀 “요한은 물로 침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되어 성령으로 침례를 받으리라” 하신 말씀이 잘못 보면 꼭 중생을 뜻하는 것으로 들리지만 실로 성경기록에는 성령침례를 중생으로 본 경우(요 3:5~6, 롬 8:9, 고전 12:3)와 성령충만을 뜻하는 경우(요 16:14, 행 4:31, 엡 5:8)가 있음을 잊어서는 안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가 이렇게 말하는 의도는 오순절 성령강림은 성령충만과 이에 따른 복음전도 사역에 무게가 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둔 말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이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은 예수님의 11제자뿐 아니라 120문도들이 다같이 모인 자리였고, 보편적으로 성령이 임하신 사건이기 때문에, 이 성령강림 사건 안에서 오직 성령충만만을 내세우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본다.


그리고 이순한은 오순절 성령강림 시에 나타났던 성령충만이 오직 기도에만 열중함으로써 주어진 것인지에 대해서 다른 각도에서도 볼 수 있음을 제시했다. 그는 렌스키가 “유대인들은 서서 기도하는 데 그들이 앉아 있었다는 것은 제자들이 어떤 설교를 듣고 있었음을 보여준다”고 말한 내용을 가지고 오순절의 성령충만은 계속 기도하는 가운데서도 신도들이 기도만 한 것이 아니라, 자주 사도들이 설교하는 것을 들으며 기도했다고 볼 수 있다고 말했다. 그가 이렇게 말하는 것은, 오늘날 오순절주의나 신 오순절주의 그리고 신사도운동에서 성령침례를 받기 위해서는 오직 회개하고 기도에 전념해야 한다는 주장에 대해서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며, 오히려 말씀을 근거로 기도하는 것이 성령충만을 받는 데 유익하다는 점을 나타내고자 한 말이라고 본다. 왜냐하면 그는 베드로가 고넬료에게 복음의 말씀을 전하고 있을 때에 성령이 임하셨다고 증언하면서 (행 10:44~46), 그것이 오순절 성령강림 시와 똑같은 성령이 내려오셨다고 예루살렘교회에 보고하는 말씀(행 11:14~17)과 일치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그는 오순절 성령강림이 주는 결과, 즉 성령의 보편적 강림, 주님의 약속의 성취로서의 성령강림, 성령충만으로 말미암은 제자들의 변화, 그리고 오순절 시의 방언의 특별한 의미에 대해 귀기울여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방언은 성령충만에 의해 발생한 것이라는 점을 분명히 한다. 그리고 어떤 주석가들 가운데 이 방언과 고린도전서 12장과 14장에 나오는 방언을 이적으로 보는 것은 좋으나, 그것은 이미 1세기에 국한된 것이요, 사도교회시대가 끝나자 영구히 없어지고 역사적 교회에 이것이 있을 필요가 없다고 주장하는 점에 대해서는 지나친 해석의 비약이라고 했다. 그에 의하면, 만일에 이 모든 것이 끝났다면, 주를 믿는 그리스도인이 자신의 연약한 질병을 위한 치유의 기도를 아무도 드리지 못할 것이며, 실제로는 오늘날에도 방언이나 신유은사가 얼마든지 있고, 또 성경 자체도 인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2) 예루살렘교회와 성령의 충만한 사역
오순절 성령강림 이후 예수의 택한 제자들을 통한 성령의 본격적인 활동이 시작되고 있다. 즉, 성령의 역사하심으로 말미암아 초대교회가 태동하게 됐으며, 예루살렘교회는 예수의 증인으로서 복음을 전파하는 사명을 적극적으로 수행하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앉은뱅이 치유사건이 발생했고(행 3:1~10),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한 베드로의 설교(행 3:12~26)가 있었으며, 이를 통해 성령충만을 입은 사도들을 중심으로 예루살렘교회가 점점 흥왕하게 됐고, 또한 자연적으로 복음은 예루살렘과 유대 전 지역으로 확산됐다. 존 스토트는 우리가 오순절에 대해 생각할 수 있는 방식에는 적어도 네 가지, 즉 첫째는 예수님의 구원 사역 중 재림 이전에 이루어진 마지막 행위이자 그 성취로서 성령을 보내셨다. 그런 의미에서 오순절은 되풀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둘째로 오순절은 사도들에게 특별한 영향을 담당하기 위하여 필요한 장비를 갖춰줬다. 즉 성령이 그리스도 증인으로 살게 할 것에 대해 생각나게 하고 가르치는 사역을 하실 것이라고 약속하였는데(요 14~16장), 그것이 오순절에 성취됐다는 점이다.


셋째는 오순절은 새로운 성령시대의 개막이었다. 이제 하나님의 백성은 이제 어디서나 그리스도 예수증인이 되도록 무장시키시며, 비록 사도들에게만 성령의 영감이 주어지지만, 성령의 충만은 모든 그리스도인이 됐다는 점이다.


마지막 넷째는 오순절은 “첫 번째 종교부흥”이라 불렸는데, 이는 하나님의 색다른 방문 중의 하나님을 보여주는 것으로서 급하고 강한 바람 소리나 불의 혀 같은 것이 보이는 물리적인 현상이나, 죄에 대한 깊은 자각(행 2:27), 그리고 하루에 3000명의 회심자가 발생했던 것이다(행 2:41). 존 스토트는 오순절 사건을 이와 같이 네 가지 특성으로 요약하면서 “나는 오순절 사건의 이 네 가지 의미를 파악하지 못하고 그것을 구분하지 못하는 것이 ‘오순절적 그리스도인들’과 ‘비오순절주의나 신 오순절주의가 성령은 구원을 위해 주어진 것도 아니고, 성화를 위해 주어진 것도 아닌, 오로지 ”봉사를“ 위해 성령님이 주어진 것이라고 이해하는 점에 대한 비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