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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聖)’자에 얽힌 유감

 

오늘 엄마가 죽었다.” 알베르 까뮈(Albert Camus)의 소설, ‘이방인(L’Etranger)’의 첫 문장이다. 주인공 뫼르소가 한 말이다. 요즘 조국교회에 상식이 죽었다. 신앙은 기적이지만, 신앙생활은 상식이다. 은혜만 되면 되는 게 아니다. 많이만 모으면 정통(Orthodox)이 되는 게 아니다. 전통(tradition)이라고 다 맞는 것이 아니다. 익숙하다고 올바른 것도 아니다.

 

말에는 숨이 있고 글에는 혼이 있다. 누구나 말을 하고 글을 쓰는 시대이지만, 특별히 목사는 말을 하고 글을 쓰는 사람이다. 말과 글을 어법에 맞게 쓰는 것은 예의요 상식이다. ‘악화가 양화를 구축한다.’는 말이 있다. 원래는 경제논리이지만 나쁜 것이 많아지면 좋은 것이 사라진다는 뜻으로도 쓰인다. 교회용어가 그렇다. 교회나 예배에서 쓰이는 용어가 국문법에 맞지 않는 것이 많다. 문제다.

 

필자가 섬기는 교회에서는 10년 전부터 이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바로 쓰기를 하고 있다. 예배나 교회모임에서 대표기도는 기도인도로, 중보기도는 중재기도(이웃을 위한 기도), 사회자는 인도자로, 대예배는 주일아침예배로, 헌금은 봉헌으로, 축제는 잔치로, ‘기도드렸습니다기도드립니다, 결혼은 혼인으로, ‘예배 본다(예배드린다)’예배 한다, 기도 중에 집사님은 집사로, 모태신앙은 모태출석으로, 설교 중 축복 한다소망 한다로 바꿔 쓰고 있다.

 

국문법보다 더 문제가 되는 것은 성경말씀과 상치되는 것이 있다는 것이다. 우리 침례교회는 순례하는 교회요, 전투하는 교회다. 피 흘린 발자취를 따라가는 교회이다. 침례교회는 침례식(Immersion)을 행한다. 침례와 주의 만찬은 주님이 행하라고 하신 명령이자 규례(ordinance)이다.

 

교회가 쓰는 용어에는 그 속에 담겨진 뜻이 있다. 침례는 자신이 죽고 장사되고 주님과 다시 일어나는 것을 보여준다. 그래서 침례는 복음이다. 물론 침례나 세례로 천국과 지옥이 결정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침례는 선한 양심이 하나님을 향하여 응답하는 것(벧전4:21) 아닌가.

 

침례라는 용어는 고수하면서 왜 주의 만찬을 성찬식이라고 하는지 모르겠다. 성만찬도 성경적인 용어는 아니다. ‘()’자만 쓰면 거룩해 지는 것이 아니다. 성찬식은 영어로 ‘Sacrament’이다. 이것은 천주교의 일곱 성례전 중의 하나가 아닌가! 일곱 성례전의 중심은 화체설(化體說, transubstantiation)이다.

 

화체설은 떡(wafer, 미사의 빵)과 포도주가 신비적인 방법을 통해 실제로 예수님의 살과 피로 변한다는 것이다. 성경에 나오는 주의 만찬은 우리 죄를 속하시기 위해 희생하신 주님의 몸과 흘리신 피를 기념하는 것이다.

 

로마 카톨릭 천주교의 미사(Mass)는 태양신인 니므롯(Nimrod)에게 바쳐진 인신제물의 피와 살을 먹는 의식에서 나온 것이다. A.D 394년에 그리스도의 죽음에 대한 기념이 미사라는 축제(Cannibal)로 대체되었다. 이처럼 주의 만찬을 성찬식이라고 하는 것은 천주교의 화체설에 동조하는 것이다.

 

아니다. 우리는 떡과 잔을 기념하는 것이다.” 그렇게 말하고 싶은가? 악은 모든 모양이라도 버리라(살전5:22), 하셨다. 하물며 그 말이 악한 뜻과 모양을 담고 있는데야. 범박하게 주의 만찬(the Lord’s supper, 고전11:20)이라고 하자.

 

성찬식과 직접 관련이 있는 축제 얘기도 해야겠다. ‘두 개의 바빌론을 쓴 히슬롭은 신()의 살을 먹는 것은 식인사상에서 발생했다고 말한다. 이교도 사제들이 모든 희생제물을 먹었으므로, 경우에 따라서 인신제물을 바친 경우에는 바알의 제사장들이 사람의 살을 먹어야만 했다. 그러므로 칸나-(Cahna-Bal)’, ‘바알의 제사장이라는 말은 현재 우리가 식인종을 부를 때 쓰는 ‘Cannibal’이란 단어의 어근이다.

 

쉽게 얘기해서 축제(祝祭)는 미사라는 뜻이요, 바알의 제사장이라는 뜻이다. ‘축제를 사전에서 찾으면 축하하여 지내는 제사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부활절 축제, 감사절 축제라는 말은 비성경적이다. 이 언어는 이교적이고 미신적인 용어이다. 축제는 잔치(Feast, 고전5:8)로 바꿔야 한다.

 

()’자 얘기가 나왔으니 성전(Temple) 이야기를 안 할 수가 없다. 교회건물을 지어놓고 성전입당예배라고 하는 것은 말도 안 되고 뜻도 안 된다. 예수님 믿고 구원받은 우리가 성전(고전3:16)이고 우리 몸이 성령의 전(고전6:19) 아닌가!

 

그리하여 주 안에서 한 거룩한 전(an holy temple)으로 자라가는 것(2:21) 아닌가. 교회건물을 성전이라고 하면 다시 구약시대로 돌아가야 한다. 자칫하면 기복신앙을 조장할 수도 있다. 교회론에 심각한 오류가 생긴다. 말이 그렇지 뜻이 그런 건 아니라고 하고 싶은가. 지금 뜻도 바뀌고 있지 않은가.

 

하는 김에 성도(聖徒) 이야기도 해보자. 예수님 믿고 구원받은 우리는 성도(saints)’이지 평신도(laity, layman)’가 아니다. 평신도 운동, 평신도 훈련이라는 말은 성경에 없다. 평신도라는 말은 로마 카톨릭 학자들에 의해서 개신교에 유입된 것이다.

 

조국교회에는 1975년 이후에 들어왔다. 오늘날 널리 쓰이는 제자 훈련, 혹은 평신도 운동이라는 말은 원래 1930년대 이후에 미국을 중심으로 일어난 성경으로 돌아가자는 운동이었으며, 순수한 성경공부 운동이었다. 그러던 것을 핸드릭 크래머, 이반 콩가르, 반 룰러 등의 로마 카톨릭 신학자들이 성경공부 운동을 평신도 운동으로 대체시켜 버렸다.

 

평신도라는 말 자체가 로마 카톨릭의 용어이지, 성경의 용어는 아닌 것이다. 평신도가 있으면 고(?)신도도 있는가? 혹시 그게 목사이고 장로교 장로인가? 목사는 직분이지 계급이 아니다. 내친김에 영성훈련(Spiritual Exercise)’에 관해서도 언급해야겠다. 이쯤에서 글을 접고 싶은 마음이다. 돌이 날아 올 것 같아서. 영성훈련이라는 용어가 조국교회에 들어온 것은 그리 오래지 않다.

 

그러나 그 기원은 오래됐다. 영성훈련은 1517, 마틴 루터의 종교개혁으로 위기에 처한 로마 카톨릭이 반종교개혁을 시도했는데, 그 선봉에 선 자가 이그나티우스 로욜라(Ignatius de Loyola). 로욜라는 마리아 숭배자요, 검은 교황(Black Pope)이며, 영성훈련의 아버지이다.

 

사실 종교개혁도 기독교개혁이라 해야 하는데, 어쨌든 로욜라는 로마교황의 허락을 받아 예수회(The Society of Jesus)를 만들어서 종교개혁에 대항하기 시작했다. 그가 했던 훈련이 영성훈련이다. 말이 훈련이지 악령과 교제하고 악령을 섬기는 의식이었다.

 

흑마술(black magic)의 기본인 공중부양술은 기본이다. 경건훈련이라는 좋은 말이 있는데 왜 굳이 그런 용어를 쓰는지 이해하기 힘들다. 우리 신학교에서도 이 용어를 쓰는 걸로 알고 있다. 선한 용단을 기대한다.

 

사과하는 말로 글을 맺어야 할 것 같다. 주님의 몸 된 교회(the local church)를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으로 필을 든 것인데, 조금은 마음이 무겁다. 쓰고 있는 말을 아니라고 하자니 죄송한 마음이 앞선다. 널리 혜량하시기를 소망한다.

 

김현일 목사 / 사랑진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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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다시 사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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